브런치북 휴학일기 09화

첫 심리상담, 폭식. 우울. 대인관계

나를 사랑하는 방법. 나 자신을 허용하기까지

by 사이



문제는 늘 고요한 때에 시작된다.

겉보기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평범한 일상인데 어디선가부터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다.

처음엔 그냥 그런 날이겠거니 넘겼던 밤들이 쌓이고 어느 순간 그것이 패턴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늦은 저녁을 먹고 후식도 먹고. 있는 대로 이것저것 꺼내먹으며 핸드폰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냥 스트레스 때문이라 넘기기엔 상황이 점점 악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나는 폭식행동으로 상담을 신청했다.


사실 상담은 방학이 오기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그동안 나를 따라다니던 우울감에 대한 실체를 파헤치고 싶었고 상담심리 전공자로서 상담을 받아보는 경험이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마음이 반반씩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막상 심각성을 자각하고 나니까 도움을 요청하기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상담심리학을 전공하며 상담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절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배워왔지만 막상 그 ‘누’가 내가 되자 음침한 사람처럼 보이진 않을지, 문제 있는 사람이라 소문나진 않을지 걱정됐다. 같은 과 친구들이 실습하는 학교 상담센터에서 내 가장 솔직한 이야기를 다 털어놔도 괜찮은지 걱정이 밀려왔다.

브런치에 이 후일담을 적기로 마음먹기 까지도 한참을 망설였다. 하지만 휴학기간 동안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첫 심리상담에 대해 쓰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지금, 그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음식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기 시작했다. 감정이 복잡해지면 습관처럼 배달앱을 열었고, 주문한 음식을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서 기다리다가 현관 앞에 놓인 배달음식을 손만 뻗어 가져온 뒤 유튜브를 틀어놓고 끝없이 먹었다.

배가 부르다는 감각은 어느새 무뎌져 있었고, 그걸 다 먹고 나면 달달한 디저트를 다시 시켰다. 그것마저도 다 먹고 나면 냉장고를 열어 아무 음식이나 꺼내먹었다. 김, 밥, 김치 같은 것들.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마음속 어딘가가 허전해서 먹는다는 걸 그대는 정확히 몰랐던 것 같다.


먹는 걸 멈추고 나면 다시 누웠다. 유튜브를 켜고 아무 영상이나 틀어놓고 그저 누워있었다. 몰려오는 피곤함과 뻐근해진 눈을 버텨가며 시간을 흘려보내다가 졸음을 이겨내며 겨우 뜬 눈앞이 희미해 보일 무렵엔 방바닥에 널브러진 배달 용기과자봉지들이 보였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설 때마다 한 번씩 발에 툭툭 걸리는 쓰레기들을 보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폭식의 시기는 하루, 이틀 정도 반복되다가 괜찮아지는가 싶더니 이후엔 일주일 가까이 지속되기도 했고, 그 간격은 점점 더 짧아지고 있었다.


상담을 하면서 내가 이런 식으로 현실을 피하기 시작한 시점을 되짚어보게 되었다. 처음은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였다.

2020년과 2021년. 짧은 회사생활과 재수생활을 거치며 두 해 동안 만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깊이 친한 친구 없이 졸업한 학교생활을 끝으로, 주기적으로 연락하는 친구는 애초부터 없었고 멀리 사는 부모님과 마주한 횟수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렇게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아가면서 어느 순간, 내 삶 전체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왔다. 그때 처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매일 밤마다 잠들기 전엔 내가 다양한 방식으로 죽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다. 그리고 그 시기엔 나 자신에게 상처를 내며 견딘다는 감각을 붙잡았던 날들도 있었다. 그것밖엔 달리 할 줄 아는 게 없었던 시기였다.


다행히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 그것은 멈추었다. 그래서 내가 그 시기를 이겨낸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폭식이라는 다른 방식의 도피가 그때부터 새롭게 시작되고 있었다는 걸 상담을 통해 깨달았다.

진로에 대한 고민, 자기 계발에서의 정체감, 내가 무능력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먹는 것으로 감정을 덮었다. 예전만큼 위급하진 않았지만, 어쩌면 더 교묘하고 조용한 방식으로 내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다.










선생님은 내게 뭐든 다 먹어도 괜찮다고 말씀해 주셨다. 단, 먹을 때만큼은

‘이건 나쁜 음식인데, 건강하지 않은 음식인데 내가 또 이런 걸 먹네’가 아니라, ‘지금 나를 위로해 주고 행복하게 해 주는 음식이 내 몸에 들어오고 있다’

내 앞에 있는 음식을 욕망의 결과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를 살아가게 해주는 귀한 음식이라고 여겨보라고. 그 말이 실제로 내게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선생님은 늘 “애쓰고 있다.”라고 말해주셨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울렁였다. 잘하진 못해도, 내가 애쓰고 있음은 분명했다. 선생님은 매 회기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셨고, 때로는 아무 판단 없이 다 괜찮다고 말해주셨다. 그 말들이 반복될수록 마음이 조금씩 느슨해졌다.


몇 번의 회기가 지나서 상처가 조금 아물고 마음이 진정되었을 무렵엔 선생님의 시선 속에서 내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내가 나 자신에게도 저렇게 말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 자신을 허용하고, 이해하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말은 쉬운데 나는 그게 너무도 어려웠다.


나는 늘 선택의 갈림길에서 머뭇거렸다. 진로든, 사소한 결정이든. 내가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하는지도 몰랐고, 어떻게 나를 사랑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옳고, 나만 틀린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타인의 기준을 무의식적으로 좇다 보니 마음 안에서 계속 충돌이 생기고 그 안에서 혼란이 자라났다.


상담을 하면서 선생님께서 내게 잊지 말라고 강조하신 건 ‘팩트체크’‘평가하지 않기’였다.

처음 도입한 건 ‘마음 챙김’이라는 기술이었는데 온몸을 편안하게 두고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생각을 밀어내고 비워가면서, 그저 지금의 감각에만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었다.


어깨의 긴장, 손끝의 미세한 감각, 침을 삼키고 싶은 충동 같은 것들을 관찰하며 ‘지금, 여기’에 나를 머물게 했다.


그리고 이어진 ‘팩트체크’는 내게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분위기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상대의 반응을 읽느라 늘 피로감이 컸다. 조금만 사이가 틀어진 듯 느껴지면, 상대의 감정이나 말투를 내 식대로 해석하며 불안해하곤 했다. 하지만 팩트체크를 연습하면서 ‘내 감정은 감정이고, 상황은 상황’이라는 구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주고받은 말투와 눈빛, 목소리 톤 같은 추상적인 것들이 아니라 구체적 사실만으로 장면을 바라보자 그동안 내가 너무 많은 것들을 ‘추측’ 속에서 스스로 감당하고 있었구나, 하는 자각이 찾아왔다. 그러한 생각정리를 마치고 나면 불필요한 불안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친구와의 관계도, 이성과의 관계도 깊지 않으면 끊어낼 수 있다고 여겼다. 애써 쿨한 척, 잘라내는 데 익숙했다. 그런데 마지막 회기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꽤 커 보인다.”고.

생각해 보니 그동안 내가 상담실에 들고 온 고민들은 대부분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연인, 친구, 가족. 나는 관계에서 너무 지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남들이 하는 말과 기준을 받아들이고, 좌절하고, 상처받기를 자주 했었다. 그런 잘못된 관계를 지속하다 보니 오히려 관계를 피하고 거리 두는 방식을 택해왔던 것 같다.


상담을 마무리하며 선생님은,

“사람들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자원으로 여겨보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셨다.


상담 초반엔 진로고민, 관계, 연애 등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가 많았지만 결국 가장 위급하다고 느꼈던 폭식 문제를 중심으로 상담을 시작했다. 그런데 상담이 이어질수록 내가 들고 온 문제 하나하나가 결국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해답은 ‘나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리해 내며, 어떤 것은 그냥 두어야 하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용기 내어 말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의 전제가 되는 건 내가 나 자신을 허용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나’였다.

나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평정을 찾을 수 있고 비로소 결단 내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 냉정함도, 끊어내는 용기도 필요했다.

마음이 복잡할 땐 우선순위를 정하고, 결정이 내려졌다면 그 이후의 불필요한 생각은 조용히 흘려보낸다. 그리고 지나간 일들에 대해선 돌아보고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피드백과 성장만 있을 뿐, 나를 탓하는 건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모든 나를 허용하고, 모든 나를 사랑하기.

이것이 상담에서 내가 얻은 것이다. 나는 아주 귀한 것을 얻었다. 그리고 나는 분명히 달라졌다. 아직은 여전히 혼자서 이겨내는 게 두려운 마음은 있지만, 상담에서 알게 된 기술들을 활용하여 앞으로 마주할 어려움 역시 조금은 더 노련하고 유연하게 흘려보낼 수 있을 거라 다짐하며 나의 첫 상담이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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