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틈에 핀 꽃 한 송이에도 마음이 머무는 제주
휴학기간에 유독 제주도에 가고 싶었다.
해외여행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내게, 제주는 가장 가까우면서도 일탈적인 자유의 상징 같은 곳이다.
푸른 하늘과 청량한 바다를 옆에 두고 해변을 걷는 나를 상상하며 남자친구와 함께 탈 비행기 티켓 두 매를 예매했다.
전주에서 광주공항으로 가는 길엔 차 안에서 커피를 마시며 흥을 한껏 올려주는 노래를 부르며 갔다. 흐린 하늘 아래였지만 휴학동안 꼭 가고 싶었던 제주로 향하는 나의 설렘과 기대를 꺾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날이 흐려도 제주는 충분히 아름다울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실제로 비 오는 제주도는 그런대로 그만의 분위기와 색을 뿜고 있었다.)
광주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치고는 규모가 작았고 북적이지 않아 좋았다. 대기시간이 짧았던 것도 마음에 들었다. 비행기는 창가 좌석으로 일부로 골랐다.
창가에 붙어 하늘을 바라보는 게 어쩐지 어린 티가 나는 것 같아 잠깐 망설여졌지만, 그런 시선을 신경 쓰기엔 그 순간의 하늘이 너무 아까웠다. 나는 결국 흰 구름을 뚫고 제주로 향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내내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공항에 내리자 "HELLO JEJU"라는 간판과 야자수나무가 먼저 반겨주었다. 그제야 제주에 도착했다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셔틀버스 타러 가는 길에도 콩콩 뛰듯 걸어갔다.
제주에서의 첫 식사는 '고등어김치찜'이었다. 푸근한 메뉴와 달리 가게는 세련된 창가 좌석과 커다란 빨간 리본 장식으로 묘한 로맨틱함을 풍겼다. 무엇보다 식당 창밖으로 바다가 바로 보였다는 게 좋았다.
식사 내내 철썩이는 파도와 바닷새, 떠다니는 해조류 이야기까지, 풍경이 곧 대화주제가 되어주었다.
바깥으로 나오니 강한 제주의 바람이 머리칼을 휘휘 날렸다. 바닷바람은 머리카락을 전부 쓸어 올렸다가 다시 얼굴을 덮기를 반복했다. 여행을 기념하며 새로 염색한 머리를 풀고 다니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오늘도 머리를 묶었다. 아쉬웠지만 왠지 자유로움이 한 단계 up 되는 느낌이었다.
카페로 넘어가기 전엔 바닷길을 걸었다. 돌틈에 핀 이름 모를 작은 꽃마저도 예뻐 보였다.
사진을 찍어 남겼고, 그 순간이 오래 기억에 남길 바랐다. 그런 작은 것들을 발견하고 느끼는 작고 소중한 여유와 순간들이 여행의 전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화 같은 순수함을 잠시나마 마음에 장착하고 나면, 여행이 훨씬 더 깊어진다.
그날의 카페 역시 바다가 바로 보이는 오션뷰 카페였다. 멍하니 찰박이는 파도를 바라보다가 숙소에 들러 짐을 풀고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갔다. 그곳은 이번 여행에서의 Best 1. 식당이었다. 바로 <하타나카>라는 제주의 이자카야인데 거기서 처음 먹어본 '쯔꾸네'가 나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간혹 기계관리가 잘 안 되는 맥주집에 가면 비릿한 맛이 날 때가 있는데 그곳의 생맥주는 전혀 그런 것 없이 깔끔하고 청량하기만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까 아까 들어올 땐 미처 보지 못했던 바다가 또 바로 옆에 있었다. 제주는 고개만 돌리면 온통 바다였다. 속이 아주 뻥-.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았다.
식당과 숙소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지만 지금 느껴지는바닷바람과 밤공기를 더 즐기고 싶은 마음에 걷기로 했다. 걷는 걸 싫어하는 남자친구였지만 중간에 택시를 타기로 합의를 보고 우리는 함께 걸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함께 했던 그날의 짧은 밤산책이 내가 이번여행에서 가장 사랑하는 잊지 못할 장면으로 남았다.
둘째 날 아침엔 간단히 고기국수를 먹고 카페에 들렀다. 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억수 같은 비가 쏟아져내렸다. 그리고 카페 안에는 귀엽게 생긴 노란 고양이가 비 오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커피와 당근티라미수를 주문했는데 정작 테이블보단 고양이 옆에 더 오래 머물렀다.
고양이는 유난히 순하고 애교도 많아서,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한다는 '헤드번팅'같은 애정표현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고양이의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나의 팔과 다리를 지날 때마다 그 특유의 온기가 전해졌다. 바깥의 궂은 날씨와 달리, 고양이 덕분에 카페 안은 마냥 아늑하고 포근했다. 어쩌면 그 시간 속에서 휴식했던 시간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깊이 쉬어간 위로의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카페에 나오고 나서도 거센 비는 여전했고, 아쉽지만 야외 일정은 취소해야 했다.
대신, 오랫동안 가고 싶었던 오설록 티뮤지엄에 가기로 했다. 꽤 많은 이들이 다녀간 곳이었고 나 역시 한참 전부터 가보고 싶었지만 어쩌다 보니 동선이나 일정이 맞지 않아서 여태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에 예상치 못하게 딱 좋은 실내 여행코스가 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걸 보면 때론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정이 가장 잘 맞는 타이밍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도착하니까 안개에 가려진 카페 건물이 흐릿하게 보였고 눈앞에는 푸른 녹차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왠지 그 풍경은 신비로운 느낌이 더해져 몽환적이기까지 했다. 카페에서 마친 녹차 음료와 아이스크림 역시 기대 이상이었고,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차투어'같은 하루가 되었는데, 그것마저 꽤 마음에 들었다.
저녁엔 삼겹살을 먹기로 했다. 카페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남자친구가 꼭 데려가고 싶다며 멀리까지 운전해 주었다. 그런데 하필 그 가게가 당일날 휴무였다. 먼 길을 고생해 운전한 남자친구의 마음이 닿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고 걱정됐지만 그 옆에 있던 고깃집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그리고 식당 옆에 있던 아주 작은 인생네컷 부스에서 함께 한라봉 모자를 쓰고 찍은 사진은 이 여행의 또 다른 웃음으로 남았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니, 거창한 풍경보다 별 것 아닌 것들이 더 오래 남았다.
[저녁 먹고 걸었던 밤산책, 따뜻한 고양이, 비가 맺힌 유리창, 조용한 카페 안의 분위기, 달콤 쌉싸름한 녹차향, 울창한 나무 사이를 지나던 드라이브, 함께 들은 음악과 대화.]
사실 이 모든 건 가까운 곳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멀리 떨어진 제주에서였기에 더 특별했다.
아주 멀리, 멀리 떠나 여행할수록 나의 과업을 다 내려놓고 오로지 쉬고 힐링하는 지금 순간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예전엔 여행지에서 뭔가 특별한 걸 느끼지 못하면 '이럴 거면 동네 카페 가는 것과 뭐가 다르지?'싶었고, 숙소비, 교통비 등을 떠올리며 손익을 계산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요즘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여행의 핵심이란 걸 점점 더 알게 된다. 멀리 떠났다는 해방감, 낯선 곳에서의 작은 설렘, 흐린 하늘과 비구름까지 품고 있는 그날의 분위기. 그런 것들이 여행을 진짜 힐링의 시간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다.
친구가 예전에 내게 해줬던 말이 있다. "여행은 할 때보다 돌아볼 때 비로소 의미가 생기는 거래"
이번 여행이 딱 그랬다. 그때는 비가 와서 조금 아쉬웠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 촉촉이 젖은 땅과 풀내음, 빗방울이 떨어지던 바다의 진동 덕분에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다.
모든 걸 다 채우고 돌아온 여행이 아니라, 조금의 아쉬움을 그곳에 남기고 온 여행이었기에 더 자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 또 설레는 마음으로 제주여행을 계획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