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휴학일기 11화

피포페인팅, "이거라도 할래?" 색칠의 세계로!

먹고 눕기 좋은 날씨, 시험 끝 그리고 엽떡&허니콤포

by 사이


그럼 우리 그날 돼지파티 하는 거야!!


벌써 그날이 다가왔다.

돼지파티란 건 별 건 없고 그냥 친구들과 이것저것 맛있는 배달음식을 시켜서 집에서 먹는 것이다. 설명을 더하면, 오늘의 돼지파티는 시험이 끝났단 걸 핑계로 이유 없이 먹고 눕는 것을 마음껏 허용하는 날인 것이다.


대학교 1학년 때 친해진 친구들과 여전히 붙어 지낸다.

성격도 다르고 스타일도 각양각색이라 종종 “이 조합이 아직도 유지된다고?” 싶은 순간들도 있고, 실제로 학과 친구들도 무슨 조합이냐며 우리가 어떻게 모이게 됐는지 의아해하며 질문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의외의 조합인 친구들과, 오늘은 한 친구의 자취방에서 점심을 함께하기로 했다.


메뉴는 의견을 나눌 것도 없이 치킨떡볶이로 통일됐다. 보통은 메인 하나만 시키고 지갑사정을 챙기느라 사이드로 타협하지만, 오늘만큼은 이름부터 ‘돼지파티’인데 그럴 수는 없었다.

이렇게 전 날, 단톡방에서 메뉴를 정하고 먼저 시험이 끝나는 사람이 배달 주문을 하기로 했다.


11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예정보다 다들 시험이 일찍 끝났는지, 내가 마지막 도착 멤버였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눈 밑에 다크서클을 그윽하게 드리운 친구들이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멍한 얼굴로 겨우 웃으며 날 반겨줬는데 왠지 생존자의 인사 같아서 웃음이 났다.

친구들에겐 미안하지만 왠지 내겐, 그런 모습이 웃기고 평화롭게 느껴졌다.

(복학하면 나도 겪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잠시 등골이 서늘했지만,, 웃을 수 있을 때 웃어두기로 했다)




곧이어 떡볶이와 치킨이 차례로 도착했고, 엽떡 봉지를 여는 순간 매콤 달달한 냄새가 방 안을 점령했다. 주방에서는 집주인인 친구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쟁반이든 앞접시든 다 꺼내고 있었다. 그 앞접시라는 게 또, 하나같이 제각각이었다. 우리는 선착순으로 [국그릇, 밥공기, 평평한 과일접시] 등을 후다닥 가져갔다. 물컵과 수저도 같이 이것저것 챙겨서 나오는 친구를 보고 왠지 공감이 됐다.


(나도 자취방에 손님이 오면 잘 대접해주고 싶은데 좁은 수납공간이, 메뉴에 맞는 예쁜 그릇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식사는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이 조합은 혼자서는 시킬 수 없는 구성이라, 이럴 때 같이 모여줘야만 가능한 호사다. 먹으면서 친구들의 짝사랑 이야기, 연애사, 학교 프로그램 후기까지 다양한 근황들을 들을 수 있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대충 정리를 하고, 각자 하나씩 인형을 품에 안은 채 바닥에 널브러졌다.

친구의 자취방은 해가 참 잘 들었다. 작은 원룸이지만 방 바로 앞에 큰 나무가 있었고, 창을 열어두니 잎사귀들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은은히 들렸다. 에어컨 없이도 선선한 바람에 기분이 좋은 완벽한 날씨였다. 덕분에 도심 속인데도 잠시 피크닉이라도 나온 기분이었다.


그렇게 모두 각자의 시간을 잠시 보내며 살짝 심심해질 무렵, 집주인 친구가


“이거라도 할래?”


라며 붓과 캔버스를 꺼내왔다. 그건 바로 지난번에 유행했던 ‘피포페인팅’이라는, 스케치만 되어있는 캔버스에 번호만 쓰여있고, 함께 동봉되어 있는 물감을 숫자에 맞춰서 채색하는 취미활동이었다. 한 번쯤 해보고 싶었지만 괜히 좁은 방에 짐을 늘리는 게 될까 봐 미뤘던 그걸, 친구 자취방 바닥에서 시작하게 됐다.


친구 하나는 멘토링 일정이 있다고 거울 앞에서 화장을 수정하며 고데기를 했고, 집주인 친구는 싱크대 앞에서 소스 묻은 접시들을 정리했다.

남은 친구와 나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캔버스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작은 숫자 하나하나에 색을 칠하다 보니 신기할 정도로 몰입이 잘 됐다. 같이 색칠하던 친구랑 “여기 5번 있다 여기.” 이런 대화를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작은 목소리로 나누며 채색을 이어갔다. 친구가 이미 절반 이상 작업을 해 둔 상태였기에

“이 정도면 금방 끝나겠지” 생각했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집에 탁자가 없어서 오로지 팔로 몸을 지탱하면서 칠하니까 어깨가 더욱 뻐근했다. 기지개를 쭉 켰을 땐 어느새 3시간이 훌쩍 지나있었고 그때 마침 멘토링을 마친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나 끝났어. 설마 아직도 그거 하고 있는 건 아니지?”


… 하고 있었다.

그날 그렇게 피포페인팅에 시간을 바쳤지만 덕분에 아주 괜찮은 취미를 찾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꽤 많은 걸 한 것 같은 날이었다.


친구집에서,





P.S.

밖으로 나오는 길, 친구가 “꼭 스트레칭하고 자!”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 집에 와서 목만 몇 번 휘휘 돌리고 잤다. 다음 날 아침, 오랜만에 느껴지는 무거운 뻐근함과 돌덩이 같은 승모를 얻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온통 파란 바다인 피포페인팅 캔버스를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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