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휴학일기 14화

검정머리, 익숙한 낯섦에 대하여

휴학이라는 이름의 계절이 끝나갈 무렵, 빨간 머리로부터

by 사이


휴학하고 난 뒤, 난생처음으로 탈색이란 걸 해봤다.

가격이 너무 비싸서 늘 망설였고, 한참을 고민하다가도 가격표를 보면 다시 돌아서기 일쑤였다.

그러다 드디어 결심했고, 그렇게 시작된 빨간 머리와의 생활이 벌써 4개월이 지났다.


처음엔 햇빛에 비치면 빨갛게 반짝이는 머리색이 꽤 어색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조차도 재미있었다.

스타일링을 하면 머리 결이 더 잘 살아서 좋았고, 친구들도 다들 빨간 머리가 더 잘 어울린다고 말해줬다.


다만, 탈색머리는 손이 좀 많이 가는데, 열이 닿으면 금방 색이 빠지기 때문에

[머리를 감을 때도, 말릴 때도, 고데기 온도]까지 신경 써야 했다.

하지만 원래도 고온 스타일링은 잘 안 하던 터라 관리하는 건 오히려 괜찮았다.

아쉬운 건 색이 너무 빨리 빠진다는 점.


이주만 지나도 색이 변한 게 눈에 띄었다.

색이 빠진 머리색도 어울리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씻고 나서 거울을 보면 나의 피부톤과 잘 맞지 않아서 ‘얼태기’까지 올 정도였다.

화장을 완벽히 하고 머리까지 세팅하면 딱! 마음에 들었지만, 평소에는 옅게 화장을 하고 다니는 내가 감당하기엔 조금 어려운 색이었던 것이다.


여러 번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검정으로 덮자고 결심했는데, 그 순간 탈색 비용이 머릿속을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아무래도 이대로 검정머리를 하기엔 미련이 많이 남을 것 같아서 제주도 여행을 앞두고 한 번만 더 빨간색으로 염색하기로 했었다.


그땐 리뷰보다는 가격이 싼 미용실을 골랐다.

첫 방문 할인을 받아서 가격은 만족스러웠지만, 머릿결은 전보다 많이 상해버렸다.

감을 때마다 뒤쪽 머리가 뭉치듯 엉켰고, 덕분에 안 하던 헤어팩까지 챙겨 쓰게 됐다.


그렇게 염색머리에 조금씩 지쳐가던 어느 날, 사진첩에서 검은 머리의 나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왠지 지금보다 저때가 더 나은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 즈음 본가에 갔는데 언니가 집에 들어와서 내 머리를 보자마자 “가발 같다”며 깔깔 웃었다.


언니의 말에 한 번 타격을 입고, 안 그래도 매일 열람실만 들락거리는 요즘 같은 때에

밝은 머리가 더 도드라져 보여 괜히 신경이 쓰이기도 했어서 결국 엄마에게 연락을 보냈다.


“엄마, 나 검은 머리로 염색할래!!”


이 한마디를 보내기까지 무려 3달이 걸렸다.

젊은 시절 미용사로 일했던 엄마는 늘 검정머리 염색을 전담하신다.


참, 그리고 저 말은 일종의 ‘염색종결선언’이었다.

검정으로 염색하면 다시 탈색도, 일반 염색도 불가능하다. 때문에, 신중히 결정해야 했다.


그 이후에도 한 다섯 번은 마음을 번복했을까.

시간이 지나, 가족 톡방에서 언니가 “이번 주에 나 본가 내려가”라고 연락을 보내왔다. 언니가 본가에 간다고 하면 나도 늘 따라간다.


지금이 타이밍 같았다.






염색은 저녁에 하기로 하고,

본가에서 엄마, 언니, 나 셋이 함께 카페에 가기로 했다. 각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노트북이랑 책을 챙겨, 각자의 일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래도 셋이 함께 외출하는 게 오랜만이라 화장을 했는데 지난번, 내 머리를 보고 가발 같다며 박장대소하던 언니가 “화장하니까 괜찮은데?”라며 바람을 넣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이제 정말 질렸다’고 생각한 머리가 또 괜찮아 보여 혼란스러웠다.

(언니가 아주 얄미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집에 돌아왔고 그 순간이 왔다!

염색의 순간.!


이제는 어떤 머리가 나은지 따지는 그 과정 자체가 피곤해져서 빨리 검정으로 덮어버리고 싶었다.


엄마는 베란다 안쪽에서 플라스틱 의자를 꺼내 거실 한가운데에 놓았고, 아빠는 바닥에 신문지를 깔아주셨다. 온 가족이 함께 있는 거실에서 염색을 하려니 뭔가 더 비장하게 느껴졌다.

(원래는 늘 욕실에서 염색했는데, 엄마는 오늘은 왠지 거실이 좋다고 하셨다. 이유를 물었지만 딱히 없다셨다. 참, 알 수 없는 우리 엄마다.)


내 손으로 직접 검정 염색약 포장을 뜯어 엄마에게 건넸다. 엄마는 작은 그릇에 염색약을 풀고 휘휘 저은 뒤, 브러시로 염색약을 내 머리에 척. 올리셨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내려앉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던 머릿결 고민, 색깔 고민, 망설임들이 시원하게 떨어지는 소리였다.


염색약을 다 바르고 나서 30분쯤 기다리는 동안에 약이 바닥에 묻으면 안 돼서 꼼짝도 못 하고, 불편한 의자 위에서 신문지를 밟고 기다렸다. 그나마 겨우 비스듬히 보이는 TV 화면을 보면서 그 시간을 견뎠다.

(하지만 힘든 것보다, 기대되고 설레는 마음이 훨씬 컸다.)


그리고 드디어, 감는 시간.

욕실로 들어가 고개를 숙여 머리를 감은 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을 때 —

거울 속엔 까맣게 물든 새로운 내가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검정머리였다.


탈색 전의 머리도 완전한 검정이 아니라,

(탈색 없이) 갈색으로 염색했던 머리라서 검정 머리의 나를 보는 게 한 1년 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탈색을 해서 그런지 예전보다 훨씬 '까아만' 머리색이었는데 그것도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다.






이제 벌써 학교 1학기가 끝나고,

친구들도 모두 방학을 맞았다.


휴학의 첫 도전이자 시작이었던 빨간 머리를

다시 검정으로 물들이고 나니 무언가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제자리’의 감각이 예전과는 조금 달랐다.


검정머리는 본래의 내 색이다.

그래서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설다는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그건 아마 머리색은 전과 같이 되돌아왔지만, 그 사이의 시간 동안 내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빨간머리를 종결하면서 예전으로 돌아온 듯하지만,

사실은 돌아온 내가 더는 예전의 내가 아니란 걸 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휴학 초반, 아무것도 시작할 용기가 없어서 하루하루를 붙잡고만 있던 내가

지금은 운동도, 식사도, 공부도 내 호흡대로 조율하며 균형을 맞춰가고 있다.


곧 수강신청 시즌이라 복학도 신청해 뒀다.

이렇게 나의 휴학도, 그 시간을 기록해 온 휴학일기도 조금씩 끝을 향해 가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검정머리를 질끈 묶고 열람실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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