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휴학일기 15화

마지막 휴학일기, 부서진 마음 위에 자라나는 것들

의지가 아니라 허용에서 시작되는 회복

by 사이



매주 화요일.


휴학일기는 휴학기간 동안 내 유일한 일정이자 가장 큰 이슈였다. 글을 업로드해야 하는 마감기한이 있으니 브런치는 내게 있는 유일한 업무였던 것이다.


처음 글을 쓸 땐 많이 떨렸고, 그만큼 설레었다. 작가 신청이 두 번째 시도 만에 승인되었기에 그 시작이 더욱 기대되고 소중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업로드를 마치고 나면 맞춤법이 틀리진 않았는지, 오타는 없는지 몇 번이고 글을 다시 읽었다.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는, 내내 방 안에서만 누워 지내며 생활하는 내가 꼭 '잉여인간'이 된 것 같았다.

공부에 집중해 상위권을 유지하는 친구를 보면 그 책임감과 집중력이 존경스러웠고, 학업보단 친목을 중시하는 친구를 보면 청춘을 제대로 즐기고 있구나 싶어, 그 자유로움이 부러웠는데 그 속에서 나는 그저 늘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었다.


그런 생각에 빠져있던 내게 <휴학일기> 연재는 나 역시도 어떠한 사회의 일원으로서 무언가를 해내고, 느끼고, 표현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게 해 주었고 그러한 사실이 내게 안정감이 되어주었다. 그러다 한 번씩 댓글이 달리면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나서 참 감사했다. 그건 단순한 기쁨을 넘어 나 역시도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고 소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증표였다.






그러다가 한 회차, 두 회차 글을 쓰다 보니 점점 욕심이 생겼다. 처음엔 손에서 글을 놓지 못했고, 자려고 누웠다가도 좋은 문장이나 표현이 떠오르면 메모하느라 잠 시간을 미뤘다. 그러다 또다시 잘해야만 한다는 익숙한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무너진 시기를 지나 조금씩 나아질 무렵이면, 늘 그랬다. 기분이 나아지면 그 자체에 머무르지 못하고 더 잘하지 못하는 나를 원망하고 탓하는 것. 그렇게 '잘해야만 한다'는 강박은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깊숙이 자리 잡은 오래된 사고회로였다.


그러던 중 상담을 받으면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인정하는 연습을 하게 되었고 처음엔 많이 어려웠지만 회차를 거듭할수록 점점 상담 때 배운 기술들이 익숙해졌다. 몇 개월 뒤엔, 회피하지 않고 내게 일어나는 감정들을 바라보고 해소해 내며, 불안/강박에서 서서히 걸어 나오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글쓰기도 점점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나의 자원으로 다시금 되돌아왔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나를 짓누를 때가 많았고, 현재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필요한 휴식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시간의 흘러감에 따라 더해지는 부담감은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지난 시간 동안 나는 많은 것들에 도전했고 아무것도 안 했다는 평가는 나만의 기준이었다. 사실 그 말속에는 언제나 욕심이 담겼고, 나 스스로에게 ‘당장의 성과’를 내라고 쏘아붙이는 말이었다.


나는 늘 뭔가를 성취해야만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며 만족했고, 그렇지 않은 날은 허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긴 인생은 바라보지 못하고 하루 단위의 성과에만 매달리며 조급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하지만 이 글을 마지막으로 <휴학일기>의 연재를 마무리한다고 생각하니 아쉬워서, 마음을 달래고자 그동안 쓴 글들을 주욱- 둘러보았는데, 생각보다 참 많은 것들을 해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글을 다시 읽어보며 가장 많이 느껴진 것은 바로, 내가 “여행자”라는 사실이었다.

살면서 가족여행은 세 번뿐. 그 덕에 학창 시절 개근상은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그런 내게 고속도로는 곧 할머니 댁이었다. 승용차를 타고 한참을 달리는 일은 오직 명절뿐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아빠차의 목적지는 늘, 할머니댁이었다. 아빠는 일이 바빴고, 가족들이 다 함께 시간 내어 여행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지금까지도 내가 여행을 잘 못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휴학일기에 담긴 글 속에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커피페어, 불꽃축제, 책쾌, 전시회...


생각보다 다양한 곳에 다녀왔고, 짧지만 진한 경험들을 해왔다. 그렇게 보면 나는 "당일치기여행 전문가"였다. 그동안, 여행에 대한 갈망만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꽤나 부지런히 나만의 방식대로 잘 여행하고, 실행하며 살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무시했던 작은 시간과 순간들이 고요하게 영감이 되고 영원의 조각이 되어 내 삶을 메꾸고 있었는데 그 소중한 조각들을 남의 것과 비교하며 예쁘지 않다고 여겨왔다. 그동안 나는 내게로 와 빛나고자 했던 그 시간들을 얼마나 홀대해 왔던 걸까.


그 어느 누구도 내 삶을 대신할 수는 없듯, 오직 나만이, 나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 부모님의 사정으로 여행을 많이 못 가서 아쉬움이 남는다면, 그것을 스스로 도전하고 해소해 내면 된다.

처음부터 주어진 것들은 어찌할 수 없지만 그것들을 바꿀 수 있는 순간들은 꼭 찾아오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의 삶이, 나의 선택과 신념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애정과 의욕이 샘솟았다.


결국 모든 건 관점의 차이라는 걸 배웠다.

"여행 결핍자""당일여행전문가"가 되기까지, 달리진 건 오직 나의 마음가짐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씩,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나 자신을 애정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오랫동안 가장 어렵게 느껴졌던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 이였는데 지금은 그 막막했던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고 있다.


요즘은 혼자 밥을 먹을 때도 대충 먹지 않고, 예쁘게 그릇에 담아 한 끼를 대접하고 차린다.

공부 루틴을 지키면 그 뿌듯함을 기꺼이 인정하고, 지쳤다면 그 감정을 알아차려 일정을 조정한다.


'쉼'이 나태가 아닌 회복의 과정이란 것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나에게 이런 커다란 변화를 안겨준 요인은 바로,

마음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씨앗을 들여다볼 용기를 얻은 것이다. 예전에는 불안이나 슬픔이 올라오면 그 원인을 찾아보기보다 감정 속에 머물곤 했는데, 그러다 점점 깊어가는 감정에 빠져, 서서히 감정의 원인을 잃어버리게 되고, 곁에는 우울감만 남아있었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극복하는 것에 있어서, 상황을 사실적으로 바라보는 연습이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진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걸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인지 올바로 판단하고 직면하는 것이다.


이제 복학하면, 내가 가장 겁먹고 두려워했던 "진로"라는 또 하나의 커다란 산이 앞에 놓여있지만, 조금은 성장한 나와 함께 손을 잘 맞잡고, 차분히 걸어가 보고 싶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않길 바라며 말이다.




이 글을 끝으로, <휴학일기> 연재는 마무리하지만 새로운 경험이 생긴다면 또 찾아오게 될 것 같다.

내가 경험했던 것과 좋았던 추억들을 기록하고 나누는 것의 기쁨을,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기 때문이다. 혼자서도 글은 자주 쓰기 때문에, 그땐 에피소드를 차곡차곡 쌓아서 조금 더 준비된 상태로, 새로운 브런치북을 만들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접하게 된, 삶에 지친 누군가에게 편지를 한 편 써보았다. (아마 과거 혹은 미래의 내게 전하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TO. 작은 틈새가 필요한 당신에게

누구나 무너지기 마련이고, 누구나 지난 시간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혹시라도 지금, 삶이 조금 무겁고 버겁게 느껴지는 누군가가 이 글을 우연히 마주했다면, 조심스럽게 전하고 싶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일어났으니, 당신도 분명히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요.

무조건적인 응원과 지지.

지금은 너무 지쳐있어서, 그런 말을 스스로에게 건네기 어려울 테니
그 말을 대신 전하고 싶습니다.
부디 당신 자신을 조금 더 허용해 주세요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그저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세요

기억해 주세요.
당신의 삶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P.S

끝으로,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로 감상을 나눠주셨던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구독자 수가 손에 꼽힐 만큼 적다 보니, 감사인사를 전하기조차 살짝 민망하지만, 그럼에도 그 따뜻한 한마디가 문득 떠오를 때마다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댓글을 다시 읽고, 그분이 글에서 어떤 문장을 좋아했을지 떠올리며 작은 연결의 힘을 실감했던 순간들이 참 많습니다.


여러분들 모두, 해야 할 일들로 가득한 삶 속에서 그저 아주 짧은 '사이'라도 들여다볼 수 있길 바랍니다.

그 작은 틈이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꿔줄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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