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브로 (번외)

Melancholy - Alexey Kosenko

by 라파엘

*제가 들으며 쓴 노래를 소제목으로 해 두었습니다.


정확히는 집필을 앞두고 있었다 또는 알약 다섯 개를 무심하게 삼켜 버리고 있었다 고작 오후 아홉 시의 이야기였다


자정이 되기도 전에 불행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귓전을 서성이는 구닥다리 말들 모성애의 탈을 쓴 지옥의 소리 고깝다고 생각했다 경멸하는 건 타자가 아니라 나 자신이구나


어느 지옥에서든 공기의 밀도는 같다 서늘하고 차갑지만 인간의 열의로 뜨거움이 번진다 인간은 인간이라서, 인간으로 태어남이 죄가 되어 지옥에 간다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으나 올곧게 살았다 지옥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게 아니다 찰나가 소멸하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다 나는 단지 영면하지 않고 버틸 뿐, 그리하여 지옥에 반항할 뿐


나라는 어머니에서 수많은 글을 낳는다 어떤 것은 코가 삐뚜룸하고 어떤 것은 하염없이 태가 곱다 그러나 이것들이 글에 불과하고, 실존하지 않는 실존자인 것처럼 사람도 같다 누구 하나 꽃봉오리 피우는 것처럼 보여도 죄다 인간에 불과하다 글이 글에 그치듯 인간은 인간에 그친다


아주 고요한 새벽 두 시까지 집필을 목전에 둔다 나는 새벽의 힘을 빌려 글을 쓰고 태양의 힘을 빌려 퇴고를 한다 그 과정이 누군가에겐 또 고까워 보이겠구나, 허튼 웃음으로 고착된 생각에 변화를 줘 보지만 내 삶은 여전히 오후 아홉 시다


여남은 알약을 삼킨다 머지않아 나는 오전 두 시를 마주해야 한다 새벽의 공기는 지옥을 빼닮아서 혼자 미끄러지기 십상이니까 졸음에 잠식되어야 한다 잠으로 도피해야 한다 남은 알약을 움켜쥐어 대번에 입 속으로 털어 버린다


삽시간에 수억 가지의 생각이 교차한다, 어디서 살고 있는가 내 육신은 어째서 나로 태어났는가 내 곁은 무엇으로 둘러싸여 있는가


환상처럼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공포를 시인하겠다 상실되는 것이 무섭다 뇌 속에 묻혀 사라지는 것들이 무섭다 거대한 구멍이 상실을 빨아들이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한다


이생이 끝나간다 곧 지옥이다

시나브로 죽음에 가까워졌구나

월,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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