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수, 황정아 오픈 스튜디오
역할의 층위에서
사람은 어떠한 장소에서 권리를 얻는 순간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 주위를 에워싸는 환경에 따라 호명의 방식은 달라진다.
우리 대부분은 살아가는 동안 한 가지 이상의 역할을 오간다. 만일 상반된 두 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면, 그들은 ‘나’를 중앙에 둔 채 팽팽히 당기고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러한 역할들은 평행이 아닌 수직의 관계에 놓여 있을 수도 있다. 한 겹을 벗겨낸 다음 아래로 진입하면 또 다른 역할이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일생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직업의 변화는 한 쪽의 포기로 다른 쪽이 이기는 게임이 아니라, 가장 아래쪽에 있을 목표 지점으로의 하강으로 바라볼 수 있다.
전혜수와 황정아는 2024년 각각 단체전과 개인전에 참여한 작가로 불린다. 이들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을 조금만 가까이에서 살펴본다면, 직장인으로 일했던 경험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회사에서의 지난 경험은 작가라는 지금의 이름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패션회사의 컬러리스트로 일했던 전혜수는 그림을 그리기 전, 전시 주제에 맞는 몇 가지의 색을 미리 골라 작업에 들어간다. 그래픽 디자이너였던 황정아는 전시가 수용하는 그림, 포스터 디자인, 글을 마치 모듈처럼 바라보며 그들을 전시 공간에 하나씩 짜맞추어 나간다.
집을 다르게 쓰는 법
전혜수와 황정아는 ‘집’이라는 한 점에서 만난다. 두 사람에게 있어 집은 작업을 시작하게 된 출발점이었다. 여기에서 집은 누군가의 경험에 의해 축조된, 미래를 향한 꿈이 될 수 있지만, 방랑의 숙명을 지닌 지금 시대에서는 취득하기 어려운 환경일 수도 있다. 두 작가의 상이한 접근 방식이 집에 관한 경험에 가 닿는 순간, 언뜻 비슷해 보였던 집은 굴절되면서 표현의 양상은 달라진다.
전혜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그들이 희망하는 집의 형태와 풍경을 들은 다음, 구체적인 형상의 오브제를 제작하거나 그림을 그려 왔다. 마치 전혜수는 타인의 상상을 실제 환경에 배치하는 매개자와 같았으며 그러한 제작 방식에서 상대방의 존재는 중요했다. 그러나 최근 작가의 작업에서 상대방은 더 이상 인간 존재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되었다. 전혜수는 물질화되지 않은 상상, 기억, 혹은 이야기를 우리가 속한 세계에 끄집어 오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
한편, 황정아는 집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붙잡을 수 없는 시공간으로 바라본다. 여기에서의 집은 건축물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영원해 보이는 이동의 정착을 도와줄 수 있는 존재인 듯하다. 황정아의 사진이 연결하는 과거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인간 앞에 집이 있고, 그것을 속절없이 쫓아가야만 하는 개인의 숙명을 느낀다. 그래서 황정아가 어린 시절 사진을 모아 과거의 거주지로 보내거나 시간의 틈을 보여 주는 재건축 사진을 포착하는 것은 이러한 유랑의 시간을 조금 느리게 만드는 일처럼 보인다.
작업실을 여는 일
전혜수와 황정아는 회사원에서 시각예술 작가가 되었다. 이러한 업무 환경의 변화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 것이다. 퇴근 후 지친 상태에서 작업해야 하고, 전시가 잡히기라도 하면 까다로운 일정을 조율해야 한다. 그러나 무거운 피로를 하나씩 해치워가면서 작업을 이어가는 N잡러들이 있다. 그들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작업과 일의 병행은 예술가의 생존 문제와도 맞닿아있다.
이번 오픈 스튜디오에서 이야기하는 이중생활은 작가 생활의 지속을 위한 선택을 담보한다. 황정아와 전혜수는 선택의 이유를 무력한 포기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선택은 또다른 환경으로 진입하기 위한 긍정적인 발걸음처럼 보인다.
‘직업’과 ‘작업’이라는 두 단어는 한 끝으로 달라진다. 둘 다 나란히 나아갈 수 없는 지금, 또다른 ‘업’의 비중을 줄이는 것은 종종 비생산적인 결정이라 불리곤 한다. 어떤 직업의 끝에 서는 순간을 상상하면, 주변의 따가운 핀잔들이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그렇지만 전혜수와 황정아는 그들 업의 변화를 무겁게 바라 보지 않는다. 두 사람은 양측을 동등하게 가져가지 못하더라도, 균형을 차츰 맞추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준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마치 작가가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전환은 미래를 상상하게 만드는 동력이라는 명랑한 응원이 들린다.
글 | 강다원
《이중생활》
일시: 2024.08.25 (토) - 2024.08.26 (일), 10:00 - 22:00
장소: 을지로12길 5 동화빌딩 3층 308호
작가: 전혜수(@jeon_hyesoo), 황정아(@jungahhwang)
서문: 강다원(@daoneekang)
디자인: 황정아
✳︎이 글은 전혜수, 황정아 작가의 오픈 스튜디오 ⟪이중생활⟫을 위한 서문으로 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