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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뜻밖의 인지 능력 향상

by 라이프스타일러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뇌는 단순한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순한 것을 좋아하는 신체는 복잡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뇌에게 반복은 지루할 뿐이지만, 신체에게 반복은 근육이 강화되는 확실한 방법이다. 뇌와 신체는 좋아하는 것이 반대다. 대립 한다기 보다는 보완적 완전체다.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서로를 보완해 준다.


신체가 노동을 견딜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함에 있다. 아무리 복잡한 작업이라도 작은 단위로 쪼개면 단순해진다. 쉽게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면 견딜만하다. 상품을 분류하는 작업에는 간단한 규칙이 있다. 정해져 있는 유형별로 분류한다. 수량이 맞는지 확인한다. 적재한다. 이동한다. 반복해서 사이클을 그리며 돈다. 다람쥐 쳇바퀴는 제자리에서 돌지만 다람쥐는 쳇바퀴가 돈 총 거리만큼 에너지를 소모한다. 직선으로 달리는 것이나 원을 그리며 달리는 것이나 거리는 동일하지만 효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효율성은 원이 탁월하다. 운동효과는 직선이 탁월하다. 원은 중력을 거스르는 힘이 약하고 회전하는 원의 가속도에 의해 에너지 소모가 줄어 든다. 직선은 중력을 거스르는 힘이 강하고 자력에 의해 가속도가 붙기 때문에 에너지 소모가 커진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작업이지만 자력을 많이 써야 운동이 된다. 체력 소모를 최소화하면서 작업을 하면 노동이 될 뿐이다.


두 팔을 나란히 뻗어 랙곤돌라 상단 끝을 잡고 매달려 봤다. 전신의 근육이 당겨지면서 뻐근함이 전해졌다. 쓰는 근육만 쓰고 쓰지 않는 근육은 안쓰는 상황이 지속될 때 불균형이 발생한다. 쓰던 근육은 웬만한 충격도 흡수하지만 쓰지 않던 근육은 작은 동작에도 상처 입는다. 주기적으로 전신 운동을 가볍게 해주는 것이 좋다. 동작이 클수록 운동효과가 좋아진다. 작은 동작의 반복은 노동이 되고 큰 동작의 반복은 운동이 된다. 대체로 혼자 작업하기 때문에 신경 쓸 사람도 없다. 노동을 운동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작업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손을 펴서 손바닥으로 상품 박스를 잡으면 손끝으로 힘이 몰린다. 손가락이 버티면 악력이 생기는 것이고 버티지 못하면 손가락이 붓고 아파진다. 많이 사용하면 안된다. 조금씩 사용하면서 악력이 생기는 상황을 봐서 강도를 높여 가야 한다. 손가락에는 근육보다 관절이 많다. 근육이 아닌 관절을 많이 사용하는 일은 관절염이라는 원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오후에는 분류 작업에 투입됐다. 박스로 있는 상품을 분류하는 작업은 많은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에 근육을 단련하고 지구력을 키우는데 최고다. 견뎌내는 만큼 강인한 근육이 만들어진다. 세포가 보유하고 있는 에너지를 소진하도록 근육을 써야 낡은 것이 소멸하고 새로운 에너지가 채워진다. 에너지가 소모되고 채워지는 과정이 반복돼야 살로 머무르지 않고 건강한 근육을 유지할 수 있다. 다음날 아침이면 일어나지 못할 만큼 근육이 뻣뻣하게 굳어 있다. 알면서도 현장에서는 쉬지 않는다. 한계점을 향해 끊임없이 나간다. 미련하다.


육체 중심으로 일을 하다 보면 뇌의 기능이 떨어지는 부작용이 나타난다. 핸드 스캐너로 상품을 스캔했다. 총수량이 24개로 떴다. 박스가 4개고 박스내 수량이 4개니까 사사는 이십사. 상품을 분류하고 옮겼다. 상품을 분류하고 있는데 동일한 상품 2개가 나타났다. 바코드가 없다. 아, 사사는 이십 사가 아니라 사육이 이십 사다. 남아 있던 박스 두개를 들고 급하게 뛰었다. 다행이 놓고 갔던 L카를 찾았다. 분명하게 보고 있는 사실인데도 뇌를 속일 수 있다. 뇌의 기능이 떨어지면 신체 활동도 심각한 위기를 맞을 수 있다.


핸드 스캐너로 스캔을 했다. 총 수량이 32개다. 1박스에 32개가 들었으니까 32개가 맞다. 박스를 옮겼다. 그런데 같은 상품 박스가 3개 더 나왔다. 어, 뭐지? 아, 낱개가 아니라 묶음으로 32개라는 거구나. 1박스 안에 8묶음이니까 4박스가 맞네. 뇌는 더하기 빼기는 물론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해야 한다. 무의식적 사고는 행동에 오류를 일으킨다.


밥을 먹는데 통증이 느껴졌다. 이가 씹힌 입술 자리를 정확하게 다시 씹었다. 이전의 아픔도 되살아 났다. 급하게 먹지 않았는데 이빨은 왜 엉뚱한 짓을 했을까? 아마도 뇌의 통제력이 느슨해 진 것 같다. 이번엔 툭 하고 이빨이 젓가락을 깨물었다. 이빨에서 전해지는 고통스러운 느낌이 길게 이어졌다. 분명 뼈로 되어 있는데도 통증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인지부조화가 일어나면 뇌는 오류를 알아 채지 못한다. 단순화의 부작용이다. 작업을 단순하게 반복하다 보니 지루해진 뇌가 사고를 하지 않고 판단도 하지 않는 것이다. 뇌를 지루하게 하는 건 위험한 일이다. 작업이 단순하게 반복될수록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진열은 인지능력을 향상시킨다. 상품이 맞는지 대조하고, 재고 수량도 세어 보고, 진열해야 할 공간도 탐색하고 빈 박스 정리까지 일련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진행 한다. 빈 공간을 찾지 못하거나 만들지 못하면 상품을 진열할 수 없다. 시간이 지체되면 농땡이가 되니 억울한 일이다. 빠른 시간 내에 해결해야 한다. 집중력이 생기고 창의력이 생기는 과정이다. 상품의 부피, 수량을 대입해 보면서 공간을 만들어 간다. 꽉 찬 선반에서 진열 공간을 찾아 내는 일은 뇌를 자극한다. 불가능한 공간에서 진열 공간을 만들어낸다. 숨겨졌던 재능의 발견이 놀랍다. 전생에 천재였을 것이다. 진열하는 능력을 보면 사회 어느 조직에서든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낼 만 하다.


반복되는 구구단은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구구단을 외우지 못해 방과후 남아서 외웠다. 숫자의 암기가 의미 없어 보였고 바보 같은 짓을 왜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렇게 생활에 유익하다는 걸 진작 알았더라면 더 열심히 외우지 않았을까 싶다. 소량은 하나 둘 세지만 다량은 박스 숫자와 내용물 수량을 곱해서 총량을 입력한다. 단말기에 계산기가 있어도 뇌는 습관처럼 스스로 연산을 한다. 숫자가 두 자리를 넘지 않아 다행이다. 숫자 세기, 더하기, 빼기, 곱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한다. 치매에 좋은 건지 단순해지는 건지 모르겠다.


뇌가 이해가 되고 설득이 되면 기억력은 좋아진다. 때론 상상을 초월하는 경이적인 일도 벌어진다. 뇌도 신체도 설득하고 이해시켜가면서 일을 하면 노동은 운동이 될 수 밖에 없다. 공간 지각 능력이 갈수록 좋아진다. 암산 능력도 좋아졌다. 곱하기도 하고 숫자도 계속 센다. 인지능력이 날로 향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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