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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적 불교

우바이의 생각

by 솔이

2025년을 앞두고 오랜 절친과의 차담 중에 친구가 먼저 제안해 왔다.


"나, 종교 배우고 싶어. 나 좀 가르쳐 줘."

"오, 종교? 세계 모든 종교의 전반적인 거가 궁금한 거야, 아니면 뭐 특정한 어떤 게 궁금한 거야?"

"불교. 나, 절 다녀도 불교가 뭔지는 하나도 모르겠어."


그도 나도 모태신앙이 불교이고 밖에서도 불교도라고 말하고 다니고, 집안 어른들 전부 불교를 믿는다. 그래서 늘 친구가 자기는 불교 교리가 그래서 뭔지 잘 모르겠다고 할 때마다 웃었다. 뭘 몰라, 다 알잖아- 하면, 모르겠어.라는 대답이 나오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는 뭘 많이 알고 있을까?

글쎄. 아주 어릴 때부터, 삶과 죽음, 종교에 대해 넘쳐나는 호기심으로 불교뿐 아니라 각종 종교에 대한 서적들을 읽어댔으니, 이집트 신화부터 이슬람교까지 알고 있는 걸 말해 보라고 한다면 얼마간 이야기할 수 있다. 특히나 불교는 어린 시절 불교 유치원 때부터 배워온 습관 같은 지식이 있고, 불경도 유명한 경전-가령 법화경이나 지장경, 천수경, 금강경, 화엄경 정도-은 한 번쯤 읽어 보았으니 그 내용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래서 불교가 뭔지, 부처의 사상이 어떤 건지를 설명하라고 하면 멈칫할 수밖에 없다. 아주 명료하고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무척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나 단 한 권에 모든 것이 담긴 성경과 다르게, 불경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양이 많다. 이 모든 걸 과연 내가 설명할 수 있을까. 아니, 내가 누군가에게 가르칠 수 있기나 할까. 아니,


"나도 잘 모르는데, 내가 너한테 가르쳐 줘도 될까...?"






그래서 수업이라는 이름을 달고, 어떤 불교도가 일상을 살며 스스로 불자의 생각이라고 믿는 것을 같이 나누어 보기로 했다. 그리고구와의 대화를 준비하는 과정이나 친구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도 기록해 보려고 한다. 1년 동안 이 생각 과정을 정리해 보면, 연말엔 누가 불교가 뭐냐고 물을 때 대답할 거리가 생기지 않을까?


1월 7일에 첫 수업(!)을 하기로 하였으니, 그전에 뭐라도 이야기할 거리를 찾느라 고민을 하다, 오늘 쓴 지장경의 한 구절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남염부제에 있는 모든 국왕이나 재상, 대신, 대장자, 대찰리, 대바라문들이 가장 빈궁한 자나 꼽추, 벙어리, 귀머거리, 장님 같은 여러 불구자를 만나서 보시하고자 할 때, 만약 능히 큰 자비심으로 하심下心하여 웃음을 머금고 손수 두루 보시하거나 혹은 사람을 시켜 베풀며 부드러운 말로 위로한다면, 이 국왕 등이 얻게 되는 복리福利는 백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의 부처님께 보시한 공덕과 같느니라.
왜냐하면 저런 높고 귀한 자리에 있는 이들이 가장 비천한 무리와 불구자들에게 큰 자비심을 낸 까닭이니라. 따라서 그만한 복이 생겨 백천 생에 언제나 칠보가 그득할 것인데, 하물며 의복과 음식 같은 일용품이겠는가?"

<지장보살본원경, 제10품 교량보시공덕품 (보시한 공덕을 비교하다) 中>


이 구절은, 그간 내가 모든 종교 철학에 대해 읽을 때마다 생각했던 종교의 순기능이 아주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엔 그저 '착하게 살면 복이 있나니' 같이 보이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것은 많이 가진 사람이 부족한 사람에게 나누는 일로, 다시 말해 사회 환원을 독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종교 중에서도 특히 불교는 집착을 버리라거나, 공(空) 사상에 대한 설명, 법정 스님의 무소유 같은 책이 유명한 덕분에 어딘가 종교계의 빈자의 미학*을 자청하는 느낌이 든다. (*어쩔 수 없는 건축쟁이인가. 이 비유가 가장 정확한 것 같아서 이 표현을 빌렸다.)


그러나 불교는 생각보다 생활밀접한 종교다. 출가한 비구, 비구니 스님들 뿐 아니라, 재가 제자인 우바새, 우바이들도 믿고 따를 수 있는 구절이 참 많다. 가령, 붓다는 부자를 절대로 욕하지 않는데, 오히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생활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특히 돈이 없이는 나누고 싶어도 나눌 수 없을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곳간에서 인심 나는 법이니 네가 곳간이 되거라-라고 하는 셈이다.


다만 이때에 중요한 부분이라면 하심下心하여 부족한 사람에게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심이란 불교에서 자기를 낮추는 마음을 말한다. 내가 낮아지면 자연스럽게 남이 높아진다. 다시 말해, 내가 국왕이라 할지라도 우월한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된다.


내가 타인과 같은 입장에서 돕는다면 그것은 동정 sympathy이 아니라 연민 compassion이 된다. 동정은 남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고 가엾게 여기는 것이라면, 연민은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 그 자체다. 따라서 타인에게 동정심이 아니라 연민심을 갖는 것은, 나와 타자 사이에 차이 difference가 있음만을 알아차리고 awaer, 차별 disparity하지는 않는 것이다.


게다가 그렇게 살지 않을 이유가 없다. 연민하고 나누면 개인적으로도 복리福利, 즉, 행복과 이익이 생긴다는데 그렇게 못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유럽, 특히 독일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다보니, 불교와 절이 종교로서의 지위를 잃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만난 독일인 중에 꽤 많은 사람들이 불교철학을 명상하는 과정에서 배우고 이해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그렇다. 교회가 고아원을 짓고, 직접적으로 교회 사람들과 으쌰으쌰 해서 봉사 활동 같은 걸 할 때, 절은 눈에 띄는 사회 활동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절도 무수히 많은 사회봉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불경을 꼼꼼하게 읽어보면, 부처님이 생각보다 훨씬 더 생활 밀접하게 자제들을 가르치려고 했다는 걸 알게 된다. 더구나 행위는 언제나 마음보다 더 빨리 드러나는 법이다. 단순하게 말해서, 내가 오늘 기부한 천 원이 아프리카 한 아이의 세 끼니가 되어 줄 것이다.


나중에 또 이어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인지 붓다는 심지어, 단지 나의 이익을 위해 나누는 것과 연민심을 가지고 나누는 것이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나누는 행위는 같기 때문이다. 결국, 모두는 언젠가 깨달아 부처가 될 것인데, 부처가 되기까지 걸리는 수십억 겁 차이 따위(?)야 큰 의미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지금 여기에서 내가 누군가에게 나누어야 한다.

연민의 미덕을 옹호하지만 말고, 연민을 행해야 한다.

일상의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다. 행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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