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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번뇌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

해탈로 가는 길

by 솔이
일체중생 중에 해탈하지 못한 자는 성식이 정한 바가 없어서 악습으로는 업을 짓고 선습으로는 과를 짓나니, 착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경계를 따라 태어나 육도에 윤회하여 잠깐도 쉴 새가 없으며, 티끌 수 같은 겁이 지나가도 미혹함으로 고난에 걸리는 것이, 마치 그물 속에 노는 고기가 항상 흐르는 물인 줄 알고서, 잠시 벗어났다가 또 그물에 걸리곤 하는 것과 같나니라.

<지장보살본원경, 제3품 관중생업연품 (중생의 업연을 살피다) 中>


붓다는 해탈하지 못한 중생들이 나쁜 습으로는 업을 짓고 좋은 습으로는 과를 짓는다고 한다. 착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부분이 모두 있어 끝없이 윤회하는 중에 계속해서 고난과 고통을 겪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이 모두 겪는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성제 속의 고제, 즉, 인생은 고통이다-라는 첫 번째 진리가 나온다. 현실 세계가 끝없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가령,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만나지 못해 괴롭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만나서 괴롭다. 모든 것이 마음의 풍파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붓다는 이 모든 번뇌의 원인을 욕망과 무지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것을 향한 욕망과 갈애, 미워하는 것에 대한 무지와 집착이 모든 번뇌의 원인이 된다. 이것을 집제의 진리라고 한다.


다행인 것은 이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면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멸제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붓다가 제시하는 해탈로 가는 방법을 수행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진리, 도제다.


불교의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사성제, 고집멸도(苦集滅道)는 이러한 연기(緣起)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사성제를 말로 하면 아주 간단한 것이 된다. 사성제를 이해하는 일은 너무나도 명료하고 명쾌하다. 그러나 붓다가 말하는 해탈을 혼자서 깨닫고 이루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붓다는 그래서 해탈에 이르는 8가지의 바른 길을 제시하는데, 이것을 팔정도(八正道)라고 부른다. 정견(바른 견해), 정사(바른 사유), 정어(바른말), 정업(바른 행위), 정명(바른 생계수단), 정정진(바른 노력), 정념(바른 깨달음), 정정(바른 집중, 선정)이 바로 그 여덟 가지의 방법이다.


이 여덟 가지는 미묘하게 얽혀 있는데, 가령, 바른 견해를 가지고 바르게 사유하면 바른 말과 바른 행위가 따라오고, 그러면 바른 생계수단을 가질 수 있고 바르게 노력도 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바르게 깨달을 수 있고 바르게 집중도 된다는 연기(어떤 조건과 만남)의 순서가 있다.


한편 이것을 실천하는 방법으로서 계, 정, 학의 세 가지 분류로 나누기도(삼학;三學) 한다. 바르게 말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살아가기 위해 바른 직업을 가지고 나서야(계), 사람은 바르게 깨달을 수 있고 바르게 정진할 수 있고, 참선도 할 수 있다.(정) 그리고 그렇게 하면 마침내 바르게 볼 수 있고 바르게 생각할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이다.(혜)


붓다는 어떤 방법에서도 우선과 후순위를 정하지 않았으니 어쨌든 해탈하기 위해 이 여덟 가지는 모두 중요한 것이 된다. 게다가 연기(緣起)의 관계는 있지만 그 관계라는 게 어떤 우열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는 선후 관계없이 모든 것을 골고루 섭렵(?)해 가면 해탈로 나아갈 수 있다.


이때 바르게 노력하는 방법으로서 또다시 네 가지를 알려준다. 이것을 사정근四正勤이라고 부르는데, 역시나 굉장히 간단하다.; 첫째는 이미 생긴 악을 없애는 것이다. (단단;斷斷) 내 마음속의 욕망, 집착 같은 모든 악을 없애는 것이다. 내 마음속의 악마가 속삭일 때 그 악마를 물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아직 생기지 않은 악을 미리 방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율의단;律儀斷) 지금 이 순간에 내 마음에 나쁜 생각이 없다면 계속해서 없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셋째는 아직 생기지 않은 선이 생기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수호단;隨護斷) 온전히 다 내어 놓는 자비와 자애, 누군가에게 우월함을 느끼지 않는 오로지 그 감정으로서의 연민 같은 것이 생기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마지막은 이미 생긴 선이 더욱더 자라게 해야 한다. (수단;修斷) 나, 내 가족, 내 친구들 등등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 다른 사람들의 가족, 생명 그 자체로까지 점점 확장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앞선 글의 세 번째 질문, "고통과 번뇌가 가득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으로써, 해탈로 가는 방법을 적었다. 이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사성제에 대한 설명도 곁들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설명된 해탈로 가는 방법은 지식으로서 설명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피상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가령, 해탈을 위한 불교식 수행 방법도 있는데, 그 수행 방법을 설명하기 전에는 다른 불교 철학의 지식적인 부분을 설명해야 할 것 같아서 뒤로 미루었다.


다만, 어쩌면 누군가는 이쯤에서 앞의 글에서 했던 두 번째 질문의 답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아주 편협하게 느껴지는 답이지만 가장 명확한 해답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붓다가 말하는 부단히 어려운 방법대로 (즉, 불법을 지켜가며) 열심히 이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 그것은 해탈하기 위해서다.


불교에서는 우리 모두 이 번뇌와 고통 속에서, 이 번뇌와 고통이 모두 사라진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불법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붓다가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대체 뭘까?

다음의 글은 붓다의 깨달음에 대한 것으로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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