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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니맨 Oct 29. 2022

새로운 것들, 그리고 여전한 빈틈

서산 부석

언제나 나의 목적지는 면사무소다. 면사무소는 소읍의 행정사무를 관장하는 핵심기관으로 소읍 주민들의 농업, 생활, 복지 등을 지원한다. 또한 소읍 주민들의 민원을 해결해주는 주요 역할도 한다. 면사무소는 행정의 전천후 기지로서 근 100년 동안 그 이름을 지켜왔으며 오랫동안 면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창업자들에게 이름을 저작권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왔다. 지금도 간간이 면사무소라는 상호로 면요리를 팔고 있는 사장님들을 만날 수 있다. 물론 그들은 공무원이 아니다. 그들은 미각을 만족시키려는 사람들의 민원을 해결할 뿐이다.     


2016년도부터 면사무소의 명칭은 행정복지센터라는 이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2018년도에 명칭 변경 사업이 완료되었으니, 행정적으로 보면 면사무소의 명칭은 모두 사라졌다. 이제 면사무소는 음식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은 면사무소를 행정복지센터라고 부르기를 거부한다. 남아선호 사상의 피해자인 ‘옥남’이가 자아를 찾기 위해 이름을 ‘지수’로 개명했지만, 대부분의 세월은 그녀를 여전히 ‘옥남’이로 기억한다. 아니 기억하고 싶어 한다. 100년 정도는 살면 ‘옥남’이를 묻을 수 있을까. 그녀는 ‘지수’로 새롭게 태어났지만, ‘옥남’이의 세월은 너무도 길다. 주민들은 면사무소를 묻을 생각이 없다. 행정복지센터든 행정지원센터든 아무개센터든 이름을 바꿔봐야 소용없을 것이다.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소읍의 행정기관은 앞으로도 면사무소일 테니까.      

부석면사무소는 금년 5월에 준공된 새집 냄새가 나는 공간이다. 건물의 좌우로 직선과 곡선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입구를 살짝 비틀어 행정기관의 고압적 느낌을 완화시켜 주었다. 또한... 건축 전문가는 아니니 이 정도로 해두자. 부석면사무소는 행정 사무 공간 이외에 회의실과 주민 공동체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특히 공동체 활동 공간은 면사무소에 대한 주민들의 문턱을 낮추는 데 일조한다. 타 면사무소가 공무원과 이장들의 점유 공간인 것에 비해 부석면사무소는 주민들이 상시로 공간을 점유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현재 면사무소 뒤편으로 작은도서관과 주민자치센터가 증축공사를 하고 있고, 노인복지시설인 노노활력센터가 신축공사 중인데, 공사가 모두 마무리되면 지역 주민들의 공동체 활동은 더욱 활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면사무소 명칭이 고착화되었다고 한들 부석면만큼은 면사무소라고 지칭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주민자치와 노인복지, 지역행정, 지역공동체 활성화의 기능이 어우러진 이곳을 면사무소라고 부르는 것은 자기 비하일 것이다. 마땅히 행정, 문화, 복지의 허브 기능을 하는 만큼 행정복지센터로 불러주는 것이 좋겠다. 이름은 불러달라는 대로 불러주자.     


종희식당이 야트막한 언덕에서 시장터로 이전했다. 지역 사람도 아니면서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종희식당이 두 군데 있는 데, 그중 한 곳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종희식당 주인은 이사하면서 간판을 뜯어오지 않았다. 신축건물에 새 간판을 붙이고 싶었을 것이다. 구 종희식당 자리에 다른 누가 들어오지 않았기에 간판이 고스란히 남게 됐다. 흔적이 남은 것이다. 왜 이전했는지는 모른다. 종희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사를 한 것은 안다. 낙후된 소읍 중심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떠나버린 사람의 공간을 새로운 사람이 메꿔주지 않기 때문에 의도치 않게 흔적이 남는다.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정보들이 흔적으로 남아 지역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버스가 가버렸어...”     


버스정류장 앞에서 마주친 할머니께서 알 수 없는 푸념을 내게 던졌다. 할머니가 늦은 것인지, 버스 기사가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인지 물었지만 마스크에 필터링되는 할머니의 음성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나마 들을 수 있었던 건 차부에서 다음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7월 중순의 11시경, 날은 점점 더워질 것이었고, 다음 버스는 다섯 시간 뒤에 올 것이었다. 할머니는 정말 다섯 시간을 기다린다고 하신 건가. 뭔가 상식적이지 않은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다섯 시간이면 마땅히 댁에서 쉬시다가 다음 버스 시간에 맞춰서 정류장으로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불볕더위를 온전히 견디면서 다섯 시간을 보낸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할머니께 또박또박 천천히 말씀을 드렸다.     


“할머니, 날이 많이 더워요. 시원한 데 계시다가 천천히 나오셔도 될 거 같아요.”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뭔가를 읊조렸지만 여전히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할머니와 헤어졌다. 왠지 그래야만 할 거 같았다. 하나로마트 옆에 있는 별다방 사장님은 스타벅스가 가게 이름을 벤치마킹했다고 생각할까. 냉면만 판다는 냉면집은 정말 냉면만 팔까. 골목길을 관통하는 빨랫줄은 누가 설치한 걸까. 의식의 흐름 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커피집 하나를 발견했다.     

부석커피집. 카페가 아니고 커피집이다. 양 옆에 김밥집과 이발소를 끼고 있다. 문득 이발소가 아니고 미용실이었다면 아주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용실은 오랜 시간 머물러야 하는 공간이고, 만족스러운 헤어스타일은 기다림과 비례하니까. 기다림과 커피 한 잔. 이 얼마나 환상적인 조합인가. 커피를 주문하면서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물었다.      


“사장님, 혹시 부석면 토박이세요?”     

“고향은 대산이에요. 부석면으로 이사 온 지 10년이 넘었지만요.”     


토박이일 거라고 확신했지만 보기 좋게 틀렸다. 커피집 사장님이 부석면 토박이일 거라는 추정의 근거는 부석에 들어오면서 눈에 밟힌 취평1리 표지석과 나란히 세워져 있는 집 모양의 입간판 때문이었다. 취평1리 주민들의 동의 없이 이곳에 입간판을 세울 수는 없으니까. 설령 공공부지라 할지라도 마을 표지석 옆에 홍보물을 거치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동의가 필요했을 것이다. 법적으로 밀어붙였을 가능성은 낮다. 그랬다면 부석에서 장사를 오래 하기 힘들었을 거다. 주민들이 동의했다는 건 사장님이 동네 사람이거나 넓게는 부석면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지역 공동체는 이너써클에 대해서는 관대하다. 이런 논리를 세운 거다. 물론 보기 좋게 틀려버렸지만. 그런데 어떻게 토박이가 아니면서 표지석 옆에 입간판을 세울 수 있었을까? 커피를 주문받는 사장님의 태도에서 너무나 쉽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장님은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사람에게 친절했다. 소비자이기 때문에 친절해야 한다는 의식적인 태도라기보다는 사람 자체를 대하는 태도에 친절이 묻어났다. 이 친절함이 취평1리 주민들과 부석 주민들의 마음을 샀겠지. 부석커피집은 이름처럼 부석의 터주대감으로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켜줄 것 같다.  

행정복지센터에 차를 가지러 가다가 생수이라도 하나 사야겠다는 생각에 하나로마트를 들렀다. 떡 판매대가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걸어 들어가는 데 낯익은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물건을 사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느릿하게 매대 사이를 걸을 뿐이었다. 앉아 계시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버스는 네 시간 뒤에나 올 것이다. 행정복지센터에 걸린 공고문이 떠올랐다. 공고문에는 ‘부석면 기초생활거점의 원활한 추진과 운영을 위하여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추진위원을 모집 공고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쉽게 풀이하자면 지역 주민들의 생활여건을 개선하고자 하는 사업에 주민 대표로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을 구한다는 뜻이다. 스무 명 정도 말이다.      


어르신들이 극한의 환경에 노출되고 있음을 알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며 공감능력이 있는 위원회가 구성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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