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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니맨 Oct 29. 2022

시간을 더디 밟을 수 있는 곳

예산 대흥

시간은 절대적으로 흐른다. 초단위로 살아가는 도시민들이나 연단위로 살아가는 농민들이나 마찬가지다. 누구나 같은 시각에 묵은해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한다. 아무도 남보다 많은 시간을 소유할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은 상대적으로 흐르기도 한다. 급똥을 쏟아내기 직전의 1분과 급똥을 쏟아내고 나서의 1분이 그렇다.      


고양이 한 마리가 안내자 역할을 했다. 고양이는 가끔씩 다른 장소에 나타나 내가 대흥을 느릿하게 제대로 보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면사무소에서 만난 그 고양이를 걷는 내내 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내가 산책을 제대로 안 하고 있다는 반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도 시간을 보냈고, 고양이도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풍광이 그대로였다. 고양이나 나나 공간을 이동하면서 만났으니 시간을 보낸 게 확실한 데 막상 풍광에 시선을 돌리면 시간이 멈춰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혹시 순간이동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건 착각임이 확실했다. 고양이나 나나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으니까.


“할머니, 비 오는 데 뭐하고 계시는 거예요?”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할머니는 밭에 팥을 심고 계셨다. 농작물은 적절한 때에 파종을 해야 하고 지금이 팥을 심어야 하는 시기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맑은 날에 팥을 심으시면 좋으련만. 할머니는 오늘 같은 날씨가 일하기 좋은 때라고 괜찮다고 하셨다. 농사 전문가에게는 비가 다소 오기는 하지만 서늘한 오늘 같은 날이 볕이 따가운 맑은 날보다 농사일을 하기 좋을 날인 거다. 노동의 고단함에 공감했기에 밭을 가로질러 할머니를 도울 수 있었다. 맹자는 인간은 누구나 측은지심을 갖고 태어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발걸음이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할머니의 고단함을 느끼지 못했던 건 아니었다. 측은지심보다 내 신발에 묻을 흙덩이가 먼저 머릿속에 그려졌을 뿐이었다. 괜히 도우려다가 민폐를 끼칠 수도 있었다. 합리적인 생각이 덧붙여졌다. 결국 서둘러 인사를 하고 상중마을로 올라갔다.     


상중마을의 회관 건물은 노후화가 눈에 보일 정도였다. 적막함이 느껴지는 게 마을 주민들이 잘 사용하지 않고 있는 듯했다. 이게 상중마을만의 문제는 아니다. 고령화와 그에 따른 인구 감소로 주민들에 의한 적절한 회관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회관은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회관이 그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은 마을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문득 10분 전에 만났던 동서마을 할머니가 떠올랐다. 할머니의 발놀림은 재빨랐다. 어디를 그렇게 가시냐고 물었더니 회관에 놀러 간다고 말을 날렸다. 회관에 동서마을 주민들이 모여 있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고양이가 안내해 준 동서마을 회관이 기억났다. 할머니는 그곳에 가고 계신 것이었다. 오늘은 제대로 놀아야 한다며 약속 시간에 늦기라도 한 듯 쏜살같이 골목을 빠져나갔다. 아마 주민들이 모여 점심이라도 드시는 것이겠지.    


상중마을 이장님은 주민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옆 마을인 동서마을은 번듯하게 회관 건물을 지어 주민들이 모임 활동을 하고 있는데 도대체 우리는 뭐냐고 말이다. 동서마을 이장님이 앞서 나가지 않았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텐데. 상중마을 이장님은 난처한 입장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고 했던가. 하지만 가까운 이웃도 나보다 잘 나가면 배가 아픈 법이다. 비슷한 수준의 이웃마을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동서마을 이장님이 너무 열심히 하고 계신 걸까. 그래서 상중마을 이장님은 배가 아플까. 아니면 민원에 시달려 귀가 아플까. 이것은 농촌마을에서 벌어지는 매우 현실적인 장면이다. 비교는 고통을 낳는다.     


마을에서 만난 경운기를 2대나 보유하고 있는 할아버지는 귀가 어두웠다. 모름지기 슬로시티는 눈과 귀를 열고 입을 최대한 닫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단전에 힘을 줬다. 마을이 쩌렁쩌렁 울렸다. 무거운 공기가 삽시간에 펴져나가 민망해졌다. 사실 중요한 질문도 아니었다. 그냥 마을에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가였다. 대여섯 번 시도를 했고 그냥 어르신을 보내드리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보청기를 잃어버렸네. 저 앞집에 가는 길이니 따라오시게”     


아.. 단순히 관광객 수를 알고자 했을 뿐인데 일이 커졌다. 할아버지로부터 누군가를 소개받게 될 것이고 용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고작 관광객 수를 묻게 될 판이었다.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할아버지와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걷는 것도 불편하셨고, 호흡도 불규칙적이었다. 불과 5미터 정도 떨어진 지인이 사는 농막에 방문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힘겨워하셨다. 명분이 있었다. 농막 주인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러 방문하는 것이 아니고, 어르신의 안전을 책임지느라 어쩔 수 없이 함께 방문한 것임을 피력할 수 있었으니까.     


대전에서 귀농한 서글서글한 농막 주인은 농막 안으로 나를 초대했다. 질문이랄 것도 없고 농막 안으로 들어가면 눌러앉을 것 같아 극구 사양했다. 농막 주인은 착한 외지인에게 몇 가지 이야기들을 랩 수준으로 건네주었지만 귀가 어두운 어르신을 사이에 두고 마치 은어로 대화를 나누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가 강하게 박혀 랩을 중단시키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돌아 나오면서 저 농막 주인은 어떻게 어르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문득 궁금했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농막은 농막 주인의 목소리만으로 가득 채워졌기 때문이다. 농막 주인은 누군가와 통화를 시작했다.     


오씨 성을 가진 청년 사장님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카페 사장님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기는 나였기에 오래된 한옥의 서까래를 시작으로 질문을 쏟아내고자 마음을 먹었는데 사장님은 시야가 가려진 건너편 공간에서 도통 출몰하지 않았다. 메모 하나가 유일하게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수단이었는 데 그것은 커피를 다 마시면 그냥 두고 가라는 의미가 담긴 메시지였다. 마침 비가 추적추적 내렸으므로 작은 창 밖을 꽉 채우고 있는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한없이 쳐다봤다. 어떤 음악이 bgm으로 깔렸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송골매 담배가게였을까.. 복덕방 사장님은 내가 잠깐 앉아있던 30여 분 동안 가게 문을 열고 두 번 나타났다. 그는 처마 밑에 자리를 잡고 그 자리에 서서 담배를 하염없이 피워댔다. 뿜은 담배연기는 낮게 흩어졌고, 낮게 날아야 하는 제비들은 유독가스를 피해 날아다녀야만 했다. 문득 제비들은 이사를 어떻게 다니는지 궁금해졌다. 안전하다면 담배연기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할지도.

예당호 둘레길이 조성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당호를 좀 더 가까이서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둘레길은 때론 광활한 수평선을 보여주었고, 때론 익어가는 지평선을 보여주었다. 사실 예당호 둘레길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농부들이 매년 땀 흘리며 가꿔나가는 곡식의 지평선에 있다. 농사짓는 것이 대한민국의 식량안보를 지켜나가는 것임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거창한 담론은 농업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농업은 지역과 마을의 경관을 지키고 보존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많은 농부들은 예측할 수 없는 기상 환경 속에서도 장구의 세월 동안 작물을 재배해왔다. 예당호의 작은 뜰과 작은 뜰에서 먹이 활동을 하는 백로를 감상할 수 있는 이유는 농부들이 열심히 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대흥의 농부가 농사를 짓지 않기를 결심한다면 예당호 지평선은 폐허로 변해버릴 것이다. 예당호 둘레길은 반쪽짜리로 전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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