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신풍
때론 그 이유를 결국 알아내지 못해 허탈할 때가 있다. 신풍은 유구읍에서 불과 4km 떨어져 있다. 걸어서 10리 정도로 검정고무신 시절에는 걸어서 등하교하던 거리였다. 차로 이동하면 불과 4분 거리. 유구와 신풍은 조선시대에는 신풍현 단일 지역이었다. 신풍현은 1750년도에 신상면과 신하면으로 나뉘었고, 이후 신상면은 유구읍으로, 신하면은 신풍면으로 개칭되었다. 하나의 지역이었지만 지금은 두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뉜 것이다. 유구읍은 공주에서 시내지역을 제외하면 제일 번성한 지역이다. 반면 신풍면은 공주시에서 하위권이다. 적어도 인구수만 놓고 보면 그렇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큰 지역 상권이 작은 지역 상권을 흡수하기 마련이다. 대읍을 접하고 있는 소읍은 눈에 띄게 상권이 쇠락한다. 홍성군만 해도 홍성읍과 광천읍 인근 소읍 지역은 상권이 거의 형성되어 있지 않다.
신풍면은 좀 이상하다. 아주 근거리에 상위 계층의 중심지가 형성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소규모 상권이 유지되고 있다. 슈퍼마켓과 함께 중형 사이즈의 마트가 있다는 건 신풍 주민들이 신풍에서 소비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당들이 영업을 하고 있고, 다방들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신풍을 방문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왜 신풍면 상권은 유구에 흡수되지 않고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있는 할머니, 농약을 치고 있는 아저씨, 중국집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계신 할아버지에게 말을 열심히 붙였다. 다른 지역의 사례를 들며 이유를 물었다. 신풍은 왜 다르냐고. 돌아오는 답변은 하나같이 ‘모른다’였다. 그냥 물건을 사든, 음식을 먹든 유구로는 잘 안 간다고 했다. 이왕 나갈 결심을 했다면 공주시내로 나간다고 했다. 유구도 낙후된 건 마찬가지니까. 외곽도로가 뚫리면서 신풍에서 시내로의 접근성이 좋아졌고, 유구는 시내의 매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시내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주요 고객층에 신풍면 주민들이 포함되었다.
결국 궁금증 해결의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한 채 정유소 평상에 앉았다. 신풍정유소는 작은 규모의 슈퍼이자 버스정류소다. 이름만 놓고 보면 주유소로 착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패션감각이 뛰어난 주인장이 운영하는 가게다. 차량의 기름을 넣을 수 있는 진짜 주유소는 정유소를 지나자마자 왼켠에 있다. 아니 있었다. 신풍에 하나뿐이었던 주유소는 최근 문을 닫은 듯했다. 이제 정유소만이 주유소인지 정류소인지 헷갈리는 이름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정유소에선 등유는 살 수 없지만, 우유는 살 수 있다. 한 할머니가 평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할머니께 날이 덥다는 의례적인 너스레와 함께 어디를 가시는 길이야고 물었고, 할머니는 시내에 나간다고 했다. 왜 가까운 유구를 냅두고 시내까지 나가시는 거냐고 물었다.
“유구로 가나 시내로 가나 버스값은 똑같혀. 병원도 댕겨오고 할려면 시내로 나가야지. 아무래도 병원이 시내가 좋으니께.”
결국 노구를 이끄는 것은 병원이다. 어르신들의 동선은 병원으로 수렴한다. 거리가 멀든, 교통이 불편하든, 자외선에 노출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결국 병원에 가야 한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라면 어르신들은 무엇이든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도로교통의 발달로 1등만 살아남는 세상이 됐다. 플랫폼 비즈니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시내로의 접근성이 좋아짐에 따라 좀 더 나은 서비스를 누릴 수 있는 문턱이 낮아졌다는 것을 신풍 주민들은 잘 알고 있다. 유구가 광역적 서비스 기능을 잃어가고 있는 이유다. 유구의 안마당 주민들마저 시내의 편의성에 매료되어 버렸다.
“할머니, 신풍에는 카페가 혹시 없나요? 유구로 나가야겠죠?”
“아니여! 우리동네에 있어! 평소리 새터!”
나는 평수리라고 잘못 알아듣고 검색을 했더니 카페랄만한 장소가 나오지 않았다. 신풍면 카페를 검색하니 봉갑리가 나오길래 봉갑리에 사시냐고 큰 소리로 물었다. 할머니는 다가오는 시내버스에 승차하기 위해 자리를 일어서면서 마스크를 벗고 또박또박 외쳤다.
“평!소!리! 봉갑리는 안 돼야!”
할머니는 그렇게 바퀴 달린 박스에 몸을 싣고 떠났고, 나는 제대로 평소리를 검색했다. 평소리카페가 검색되었다. 카페가 맞는 듯 보였으나, 도저히 카페가 있을만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찍힌 곳은 평소리의 가장 구석진 곳이었다. 외진 마을의 외진 곳에 있는 카페라...이용후기 등도 나오는 거 보니 분명 카페가 운영되고 있는 것 같기는 했다. 마침 11시였고 오픈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를 몰아 폭이 좁은 지방도를 따라갔고, 평소리의 구석진 곳으로 올라갔다.
오래된 집이었다. 굴뚝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카페임은 확실했으나 연기의 정체를 도통 알 수 없었다. 혹시 원두를 볶고 있는 건가.. 그래서 저렇게 연기가 나는 건가... 여긴 가마솥에서 원두를 볶나.. 이런 망상을 머리에 채워가면서 가게 입구의 턱을 넘었다. 거칠어 보이는 남자가 가게 안에서 물건을 옮기고 있었다. 택배를 보내려는 모양이었다. 그 남자는 내 존재를 단번에 알아채지 못했다. 아무래도 귀한 내용물이 담긴 택배인 모양이었다. 드디어 인기척을 느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인상이 좋았다. 다소 거친 좋은 인상. 물과 기름 같은 건가.
뜨거운 커피 한 잔을 주문했더니 원 샷이냐 투 샷이냐를 묻는다.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 형태로 달라고 했다. 남자의 동공이 흔들렸다. 바깥 온도가 30도를 넘어서고 있는 이 더운 날씨에 뜨거운 커피를 주문하면서 원샷과 투샷을 모른다라. 커피를 잘 모르는 것 아닌가. 겉멋이나 든 놈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상식적이지 않은 손님에게 남자는 커피를 생각보다 빨리 내어 주었다.
평소리카페는 문화적 감각이 뛰어난 아들과 생태적 감각이 뛰어난 아버지가 함께 운영하는 곳이다. 카페 내부 공간은 아들이 관리하고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야외 공간은 아버지가 관리한다. 아들은 조경에 관심이 없고, 아버지는 카페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역할이 구분됐고, 이 역할이 마치 합을 맞춘 동업자처럼 퍼즐이 맞춰진 것이다. 둘은 각자의 소임에 충실하다. 그 충실함이 독특한 카페 공간으로 이어지고 둘은 하나가 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를 많이 하거나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오랜 시간을 보내지만 각자의 삶을 존중한다. 아들은 아버지의 조경 활동을 최대한 보장하고, 아버지는 아들의 경영방식을 최대한 존중한다. 이건 일종의 부자 동업이다. 조상 대대로 한사코 말려왔던 대표적인 경영형태다. 더군다나 이곳의 동업자는 삶도 공유한다.
‘나라면 아버지와 외진 농촌마을에서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살 수 있을까?’
경상도 출신의 아버지와 보수적인 문화를 싫어하는 아들. 과연 어떤 조합으로 만날 수 있을까? 아버지의 최애 프로그램은 ‘나는 자연인이다’다. 일단 아버지는 어머니를 설득하고자 할 것이다. 좋은 공기나 마시면서 노후를 살아보자고. 물론 이러한 노력은 시작부터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나는 안다. 어머니는 도시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이다. 20살에 남원을 떠나면서 갖게 된 도시 예찬의 태도는 단 한 번도 그 방향을 바꾼 일이 없다. 아버지는 자연인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여전히 시골 어딘가에 정착하고 싶어 한다. 지역개발 일을 오래 한 아들이 이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진지하게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평소리카페의 부자지간을 만나기 전까지는.
농촌지역의 삶이 녹록지 않다는 건 내가 아버지보다 잘 안다. 아버지는 한 번도 고향의 내밀함을 경험하지 못했다. 학창 시절을 보냈을 뿐이다. 고향에서의 학창 시절은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 아버지는 학창 시절의 친구들이 고향에서 보조금 쟁탈전을 벌일 때 도시에서 혹독한 임금 쟁탈전을 벌였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도는 높지만 지역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보조금의 생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때문에 학창 시절의 친구들과 고향에서 경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보조금은 곧 정치이며 친구들은 이미 지역의 권력구조를 잘 알고 있다. 보조금과 정치는 하나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역의 내밀함을 이해하는 것이다.
지역의 내밀함은 둘째 치고, 평소리 카페를 경영하는 동업자는 서로의 내밀함은 공유하게 되었을까?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와 아버지가 된 아들은 카페 운영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걸 입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