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해미
때려도 때려도 도무지 함락되지 않았다.
안시성은 작고 볼품없는 성이었다. 평양으로 가는 길목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손을 대지도 않았을 것이다. 명약관화. 도저히 질 수 없는 게임이었다. 그냥 성문을 열고 지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성의 주인은 허리를 숙이고 군대를 맞이해야 했다. 그게 피를 흘리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봄으로 가득 찬 남자는 철벽이었다. 도무지 공략이 불가했다. 갖가지 전략과 전술이 통하지 않았다. 분명히 바위로 계란을 치고 있는데, 바위가 으스러져버렸다. 그는 반드시 봄이 온다고 믿는 듯했다. 동료들도 한 마음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봄의 도래를 주문했다. 하지만 주문은 이루어질 리 없었다. 그들은 생의 마지막 겨울만을 기억할 터였다.
철벽과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싸웠던 게 실수였다. 중력의 힘을 거슬러가며 싸워서는 안 됐다. 무책임한 공성전의 대가는 처참했다. 고귀한 목숨들은 철벽 앞에 추풍처럼 쓰러졌다. 시소게임에서 우위를 점해야 했다. 철벽보다 높은 위치에 있어야 했다. 살아있는 자들은 무기 대신 삽을 들어야 했다.
산을 쌓는 데 두 달이 걸렸다. 살아있는 자들의 일부가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안시성 내부가 시야에 드러났다. 관아와 옥사, 그리고 초가집 등 성안의 삶이 고스란히 보였다. 처참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젠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병사들의 목숨과 성의 내부 정보를 맞바꾼 마당이었다. 마땅히 그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눈에 담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너무 지쳤다.
토산을 쌓고 토산 정상에서 안시성을 바라보는 당태종의 심정은 어땠을까? 과연 안시성에 봄이 오는 것을 저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봄으로 가득 찬 철벽 같은 남자의 호기를 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모르겠다. 다만 나는, 내가 서 있는 종합상가 옥상에서 해미읍성을 바라보며 ‘이 정도 보였을까?’라고 내뱉기 어려운 상상을 할 뿐이다. 읍성 앞에 우뚝 솟은 콘크리트 상가 건물의 정상을 차지하고 보니, 피와 땀으로 점철된 토성이 비켜 보인다. 상인들은 읍성에서 쏟아져 나오는 고객들을 경쟁적으로 유치하기 위해 건물을 지었다. 2층 높이지만 위치와 규모가 독보적이었다. 읍성 안의 수요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토성 못지않았다. 위치와 높이를 선점했으니 한 동안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관광상권의 요충지였다. 하지만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다녀간 후 상황이 급변했다. 상가 상인들은 배후지역으로 넓어진 전선을 감당해야 했고, 거대 자본과도 싸워야만 했다. 해미읍성의 몸값은 치솟았다. 여기에 골목식당 활성화 프로그램이 불을 붙였다. 백사장은 해미의 시장 가치를 높였고, 커피를 무기로 시장에 참전함으로써 또 하나의 전선을 만들었다.
토성의 기세는 꺾였다. 트렌디한 감각을 무기 삼은 매력적인 공간들이 우후죽순 생겨났고, 더 이상 고객들은 토성에 발길을 두지 않았다. 위치와 규모 우위에 시대는 끝나버린 걸까. 꼭 그렇지는 않다. 암울한 상황에서도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1층의 원로들이 그들에게 사람들의 발길을 토성 2층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숙제를 부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토성의 입지적 가치를 보았을 뿐이다. 토성은 예나 지금이나 위치와 시선을 독점하고 있다. 피크닉 용품점은 위치를 적극 활용할 것이고, 카페는 시선을 적극 활용할 것이다. 부디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란다. 원로들의 도움도 절실하다. 사람이 찾지 않는다고 어렵게 쌓은 토성의 일부를 해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위치와 규모의 이점을 누리지 못하는 곳에서도 변화는 나타나고 있다. 2020년도에 새로 조성된 해미시장 2층은 해미에서 가장 트렌디한 공간이다. 소읍에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기 어려운 책방이 있고, 대도시에서나 맛볼 수 있는 음식과 차별화된 음료를 제공하는 상점들이 있다. 공간은 작지만 관광객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정도로 충분하다. 청년들이 대부분 운영하는 곳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역시 접근성이다. 접근성이 떨어지니 유동인구가 적고, 상점 운영 수지가 안 맞으니 바깥 활동을 해야 한다. 제조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방문 서비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 과정에서 상점들이 문을 일시적으로 닫게 되고, 여기저기 문을 닫은 상점들 때문에 유동인구는 더욱 감소한다. 결국 폐업의 길을 가게 되고 시장은 그 생기를 잃어버린다. 새로운 토성에서 옛 토성의 전철이 벌어진다.
청년들만 밀려나는 것은 아니다. 30여 곳의 카페가 해미의 다방들을 대체했다. 읍내1리 마을회관 20m 반경에만 3개의 카페가 생겼다. 아주 젊고 트렌디한 공간으로 말이다. 젊고 트렌디한 공간은 주로 관광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영업한다. 그리고 인근에 거주하는 일부 젊은 층의 수요를 충족시킨다. 마을회관 인근에 카페가 생겼으니 마을 어르신들의 커뮤니티가 활성화될 수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이런 상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읍내1리 마을회관은 오히려 젊고 트렌디한 공간 숲에 갇혀버렸다. 어르신들의 커뮤니티는 여전히 회관 안이다. 카페가 열린 공간이기는 하지만 어르신들에게 있어 그 문턱은 높다. 그나마 문턱이 낮았던 다방은 대부분 사라졌다. 어르신들은 오래된 회관에서 사라진 다방과 재떨이를 추억할 뿐이다.
해미는 역동성이 있다. 해미읍성은 매우 강력한 관광자원이다. 이 때문에 읍성 주변 노른자 공간들은 도시지역 못지않은 공간들로 채워지고 있다. 청년들이 유입되고 있고, 새로운 아이템들이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해미에 거주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고 있다. 해미는 7,000명이 넘는 주민들이 살아간다. 관광이 활성화된다고 해서 주민들이 외지인으로 대체되지는 않는다. 읍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번잡함을 지역 주민들은 안고 산다. 떠나지 않는다.
다방이 밀려났지만 토성 2층에 자리한 전망 좋음을 주장하는 카페는 여전히 지역 어르신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누군가는 오랜만의 단비에 행복해하고, 누군가는 집안의 가보인 카세트테이프 수리를 걱정하며, 누군가는 최근 다리 수술을 한 옆집 할매를 궁금해한다. 카페 주인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카페 운영을 하고 싶었겠지만, 이 공간은 ‘카페’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다방에 가깝다. 다방은 지역 주민들을 버릴 수 없다.
“점심시간 아녀? 밑으로 내려와. 맛있는 거 사줄텐게!”
“아녀유. 손님이 계셔서 못 내려가유. 식사 맛있게 하셔유”
카페 손님 중 하나겠지. 카페 주인의 허기를 걱정하는 손님이라. 왠지 그 손님이 남자일 것 같다는 추측을 해 보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밥 먹는 자리에서 새로운 소식 보따리가 풀릴 것인데.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야 주인이 허기를 달랠 수 있을 것이니까. 주인은 아마 문을 잠깐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관광객들은 카페 문이 닫힌 것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영업시간은 고객과의 약속 아니던가. 하지만 지역 주민들은 이해할 것이다. 남의 집 사랑방이 언제나 열려있는 것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