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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은 살아남을까

'소년이 온다'를 읽고

by 허정

인간다움은 무엇일까. 이기심을 기반으로 동물적인 본능을 지닌 인간이, 인간으로 가지는 보편적인 양심과 신의, 대의를 지키려는 순수함을 어떻게 균형 있게 살아낼 수 있을까.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책을 읽으며 갖는 질문이다. 소설은 80년 5월 광주민주화 운동에서 희생된 이들의 이야기다. 슬픈 역사로 끝나지 않고 지금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일어날 수 있기에 질문은 머리를 맴돈다.




중학생인 동호는 상무관에서 군인에 의거 주검이 된 시체를 수습하는 일을 돕고 있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의 상흔을 수도 없이 보지만 그는 끝까지 떠나지 않는다. 시위대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 친구 정대를 찾기 위해서다. 쓰러진 친구를 두고 도망쳤다는 죄책감이 그로 하여금 상무관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죽음을 맞기 전 엄마가 와서 같이 가자고 해도 막무가내다. 여섯 시에 문 닫으면 들어간다는 말을 엄마에게 전할 뿐 그곳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목숨을 바쳐 도청을 사수하는 이들과 함께 하다 죽음을 맞는다.


어린 그가 끝까지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쓰러진 친구를 버리고 도망친 행동에 대한 죄책감일까. 군인들의 잔인한 살상에 대한 반발로 끝까지 도청을 사수해야 한다는 사명감일까. 훼손된 민주주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함께 하겠다는 사람들의 분위기에 휩쓸려 순간적으로 판단한 것일까. 죽음의 현장에서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도망친 것이 그리 큰 잘못은 아닐 텐데. 어린 동호는 그 장소를 떠나지 않았다.




진수의 동료였던 교대 복학생의 증언은 양심을 말한다. 총이 있어도 쏘지도 못할 것이고, 쏴도 이기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강렬한 무언가에 압도되어 겁이 없어졌다 한다. 그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양심이라고 했다. 그 양심이 사람을 숭고하고 순수하게 한 것이다. 어린 동호뿐만 아니라 같이 있던 사람들은 양심을 지킨 대가로 목숨을 잃거나 잔인한 고문으로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동호와 같이 도청을 사수했던 진수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자살을 한다. 체포되어 감옥으로 옮겨진 사람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 하나의 식판을 두고 두 사람이 밥을 먹게 함으로써 서로를 미워하게 하고 경멸하게 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 죽음을 각오했던 숭고한 양심은 개나 줘버리라는 치욕적인 모멸감으로 그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 고통은 육체와 정신에 남아 진수는 출소 후 정상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삶을 스스로 포기한다.


동호와 같이 상무관에서 시신을 수습했던 선주는 치욕적인 성적 고문을 당했다. 경찰은 노동 운동을 했던 그녀의 전력을 더해 ‘빨갱이년’이라는 색깔을 붙였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임신, 출산을 할 수 없고 타인과의 접촉을 두려워하며 그녀는 안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자신이 겪은 일을 기억하기도 말로 꺼내기도 힘들어하는 그녀에게, 성희 언니라는 사람은 자신을 지키며 남은 인생을 살지 말라는 말을 한다. 몸과 마음이 피폐한 그녀는 금남로에서 우연히 죽은 동호의 사진을 보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당시 그에게 집으로 가라고 하지 못한 자신의 살아 있음이 괴롭게 느껴진다.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사는 동호 어머니의 일상은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어머니의 삶은 자식의 빈 공간을 찾아다닌다. 곳곳에서 아들의 흔적이 떠오른다. 동호의 형들은 어린 동호의 죽음을 두고 잘잘못을 따지다 우애가 상했다. 어머니는 자식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의 죽음은 남은 가족들에게 낫지 않은 상처였다.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린 동호의 기가 막힌 죽음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인간의 이중성을 생각해 본다. 우리에게는 인간적인 양심을 가지고 서로에게 예의를 갖추며 도덕과 질서를 지키려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이익을 좇고 야만적인 폭력성을 지닌 동물적인 본능도 있다. 80년 5월 광주에서는 폭력적인 동물적 본능을 가진 자들이 양심을 가진 사람들을 짓밟았다. 그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학살 수준의 진압은 죽음과 고문으로 이어져 산자나 죽은 자가 별반 차이가 없게 했다.


시간이 흘러 그분들의 희생으로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혜택을 누리는가 싶더니 지난해 말 계엄의 망령이 준동했다. 민주주의 제도가 얼마나 허약한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권력을 놓지 않기 위해 권력자나 고위 공직자들의 양심 없는 언행을 보면서 한심하고 어이가 없었다. 오직 권력과 출세를 얻기 위해 보여준 적나라한 그들의 모습은 언제든 자신들을 위해 우리의 자유와 신체를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음을 깨우쳐 준 것이 교훈이라면 교훈일 것이다.


어린 동호는 여전히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어린 나이에 잔인한 주검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그와 같은 양심이 있는 자들이 촛불을 들고 여의도로 광화문으로 모여 여전히 민주주의를 지켰다. 아직도 반성과 수치심이 없는 내란 수괴와 그의 졸개들을 보면서 그들에게 인간적인 양심을 바라지 않는다. 양심이 없는 그들보다 우리의 양심이 계속해서 살아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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