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장례를 치르고
간밤에 내린 비로 아파트 담벼락의 철쭉꽃이 대부분 떨어졌다. 아침에는 바람까지 심하게 불더니 꽃은 더 떨어졌고 몇 개의 꽃만 간신이 붙어있다. 그제까지 분홍색의 철쭉이 담벼락에 활짝 피어 멋졌는데 허망하게 꽃이 져버렸다. 꽃이 없는 가지에는 잎만 남아 꽃과 함께 했던 화사한 아름다움은 사라졌다. 꽃이 없으니 무슨 나무 인지 정체성을 잃고 또 1년을 지내야 할 것 같다.
일주일 사이 장례를 두 번 치렀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아파트로 들어섰을 때, 담벼락의 분홍 철쭉은 장례식장의 흰색 국화보다 활기차고 화려했다. 오후 한낮의 햇빛은 따사로웠다. 철쭉은 예쁘게 한창 피어올랐고 바람이 꽃잎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일주일 전 처형의 장례를 치른 마지막 날도 오늘처럼 햇빛은 따사로웠다. 두 망자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모질고 힘겨운 숨을 쉬면서 산 자들을 위해 좋은 날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처형을 추모관에 모시고 난 후 가족들과 점심을 먹을 때였다. 삼일을 고생한 가족들 모두 지쳐있었고 말이 없었다.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 속의 장례식장에서 벗어난 식당의 일상은 밝고 환해 보였다. 햇빛이 드리운 창가에 사람들은 제각각 수다를 떨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늘 보았던 낯익은 풍경은 평화롭게 보였다. 살아 있는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처형의 투병과 죽음의 간접 경험은 하루하루 무탈하게 살아내는 소소한 일상이 어쩌면 행복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남겨주었다. 산 자는 살아야 하기에 식사를 하러 왔지만 저들의 일상이 나의 일상이 되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장례를 두 번 치르고 나니 피곤이 몰려와 돌아온 날과 다음 날 이틀 동안 잠만 잤다. 다음 날 아침 산책을 하러 아파트를 나설 때 그제 봤던 꽃들이 사라졌다. 누워만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밖으로 나왔는데 기대했던 꽃들이 모두 없어진 것을 보고 놀랐다. 화사한 꽃들이 그 사이 없어지니 상실의 아픔이 다시 한번 느껴졌다. 어차피 꽃은 수분이 완료되면 자연스레 시들지만 비바람이 강제적으로 꽃을 떨어트려 야속하게 느껴졌다. 위암으로 돌아가신 처형이 다시 떠올랐다. 처형은 미인이었고 꽃을 무척 좋아했다.
처형이 돌아가셨다고 아내의 전화를 받을 때만 해도 믿기지 않았다. 전날 아내가 처형이 좋지 않다고 말할 때만 해도 걱정을 했지만 이렇게까지 갑자기 돌아가실 것이라 예상치 못했다. 위암 4기 판정을 받고 두 번의 수술과 14번의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던 분이기에 그동안의 고생이 무위로 끝난 것 같아 허망하고 운명이 야속하게까지 느껴졌다.
처형은 서울에서 두 번째 수술을 했다. 지난해 1월에 위암 수술을 했지만 올 3월 악화되어 수술을 다시 했다. 수술 전, 암의 전이 상태와 위와 소장 등 장기 상태를 봐서 수술 여부를 판단한다고 하니 그야말로 생사의 기로에 있었다. 수술하기 전 음식은커녕 물도 못 먹는 극한 상황 속에서 통증으로 지쳐 고생하는 모습을 본 나로서는 처형이 수술을 이겨낼지 내심 걱정이 되었다.
4월 초, 수술 후 병원에서 처형을 만났다. 멀리서 병문안을 온다고 반가웠는지 처형은 손에 꽃을 들고 조카가 끄는 휠체어에 앉아 나를 찾는 모습이 보였다. 처형의 손을 맞잡고 정말 고생 많았고 잘 이겨내셨다고 전할 때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 역시 고인 눈물을 어찌할지 몰랐다. 수술이 잘 되었으니 이제 곧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앞섰다. 병원에서 어떻게 꽃을 구했는지 신문지에 싸인 꽃을 전해줄 때 아픈 몸을 이끌고 제부가 온다고 마련해 준 마음이 너무 아름답고 고마웠다. 여전히 통증 속에 힘든 모습이지만 처형의 웃는 모습을 오래간만에 볼 수 있었다. 웃는 모습은 아름다웠고 그 예쁜 웃음이 내가 본 마지막 웃음이었다.
처형의 병문안을 마치고 아버지의 장지를 알아보려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아버지는 지난해 10월에 요양원에 모셨다. 2년 전부터 앞이 안 보이고 거동이 좋지 못해 도저히 집에서 모시기가 어려웠다. 요양원에 계셨을 때만 해도 건강해 보이셨는데 6개월도 안되어 갑자기 패혈증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 의식만 있을 뿐 신체적으로 움직이지 못해 식사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 다다르자 외면하고 싶은 아버지의 죽음과 맞닥뜨려야 했다
아버지는 평소에 말이 없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무뚝뚝함을 원망하셨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그 성향을 고치지 않았다. 아니 고칠 수 없었다. 13살 어린 나이에 이북에서 넘어와 평생을 고생하며 인내하고 사셨기에 특별히 좋다, 나쁘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기분 좋으시면 약주 한 잔 하시고 별 말이 없으셨다. 요양원에 처음 모셨을 때도 아버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자주 연락을 하지 못하고 찾아뵙지 못해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요양원에 계셨을 때도, 중환자실에 계셨을 때도 아버지는 ‘뭐 하러 왔냐’고 만 할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아픔과 고통을 자신이 혼자 짊어지며 자식들을 전혀 힘들게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은 의식만 있을 뿐 자신의 힘으로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돌아가시기 전날 이따금 다리가 떨리며 몸의 경련을 보았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의 귀에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감은 눈가에 아버지의 눈물이 보일 때면 안쓰럽고 안타까워 터지는 울음을 참아야만 했다. 돌아가실 때 아버지는 힘에 부쳤는지 아무런 유언도 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죽음도 삶의 일부분이라 하지만 죽음은 여전히 피하고 싶고 나와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이고 싶다. 얼마 전까지 함께 했던 사람이 사라지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공허함이 싫다. 더는 같은 시공간에 함께 할 수 없음을 알리는 듯 차디찬 육체를 만질 때 느껴지는 섬뜩함도 싫다. 아버지를 화장장에 모시고 아침식사를 하러 가자는 장례지도사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따라나섰다. 아버지는 화장 중인데 식사하는 나 자신이 혐오스러워 한 숟갈 들다 식당을 나왔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이 그날 아침 그렇게 싫었다.
처형도 아버지도 죽음이 어느 정도 예상은 되었다. 나는 가족들과 인사하고 유언을 하는 죽음을 생각했는데 두 분의 죽음은 그렇지 않았다. 의식만 있을 뿐 고생만 하다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하다 보니 아쉬움이 컸다. 생전에 아버지의 귀에다 내 말만 했지 아버지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들은 아버지 말씀은 중환자실에서 울고 있는 나에게 울지 마라, 왜 우냐는 것뿐이었다.
떨어진 꽃잎을 보며 그제 화사한 꽃밭이 그리웠다. 날씨 때문에 꽃잎이 떨어질 줄 알았으면 피곤하더라도 그제 나와서 사진도 찍고 아름다움을 즐길 걸 후회가 되었다. 아버지도 처형에게도 그런 후회와 미안함, 죄스러움이 있다. 정성스레 장례를 잘 치러 산 자로서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장례를 치르는 것도 죽은 이보다 산 자의 그런 마음을 달래기 위해 예식이 아니었나 싶다. 나의 이기적인 마음을 감싸 안은 아버지가 떠오르며 죄송함이 다시 몰려왔다.
식물은 씨앗을 키우는데 에너지를 소모하기 위해 꽃을 떨어뜨린다 한다. 생명의 순환 과정 속에 아름다운 꽃도 인간의 죽음도 후손을 위한 자양분이 되는 거룩한 희생이니, 피할 수 없는 순환 과정으로 계속해서 진행될 것이다. 자연의 섭리라 하지만 떨어지는 꽃도, 죽음도 속절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바람에 날린 꽃잎들이 사방에 흩어져 꽃밭이 어수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