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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진 삶을 살다 간 이들을 기리며

- 작은 땅의 야수들을 읽고

by 허정

한 편의 대하드라마를 보고 난 기분이다. 50년 가까운 시간의 역사에서 주인공들은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나락 속에서 파고를 넘는 굴곡진 삶을 산다. 아슬아슬하면서도 질긴 인생을 숱한 인연 속에서 살아낸다. 일제강점기에서부터 해방정국의 좌우의 극한 이념 대립, 60년대 산업화의 과정을 거치며 살았던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 같다.


이 거대한 이야기를 작가는 우리 민족의 영물인 호랑이 사냥에서부터 시작한다. 나라를 빼앗긴 일제강점기, 일본의 호랑이 사냥은 가죽을 얻은 것 이상으로 의미를 두고 있다. 일본에는 없는 조선의 강인한 동물을 사냥함으로써 조선을 빼앗은 그들의 용기와 기백을 드러내려는 얄팍한 속셈이 있다.


책의 주인공인 옥희와 정호는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한다. 나라를 빼앗겨 가진 것이 없어 굶주린 삶을 살았던 당시 사람들이 겪었던 어려움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두 주인공은 어린 나이에 스스로 잔인한 선택을 한다. 절박한 상황에 내 몰린 사람들이 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을까. 그 대담함에 놀라게 하지만 그런 절박한 선택이 안타까워 마음을 아프게 한다.


어린 옥희는 돈 많은 사람에게 팔려가듯 시집가는 현실의 모습을 상상한다. 동네 의원의 병약한 아들과 결혼하며 사는 비참한 삶이 눈앞에 펼쳐지자 차라리 기생의 삶을 살기로 한다. 당초 어머니의 강요에 못 이겨 기생집의 허드렛일을 하러 왔지만 스스로 기생이 되겠다고 한다. 열 살밖에 안 되는 옥희가 기생의 삶에 대해 알 수 없지만, 현실 도피를 위해 운명처럼 기생이 되는 도전적인 선택을 한다. 그녀의 엄마는 자신의 딸이 기생이라는 소문이 무서워 딸과 의절한다. 엄마와의 인연은 더 이상 책에는 없었다. 그 엄마의 그 딸이었다.


정호는 호랑이 사냥꾼의 아들이다. 아버지는 우연히 일본 군인들의 호랑이 사냥에서 그들의 생명을 구해준다. 그 덕분에 일본인 장교에게서 라이터를 얻는다. 그 후 그는 오래지 않아 굶주림으로 죽는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가세가 기울자 마을의 홀아비가 정호의 예쁜 누나와 새장가를 가고 싶어 한다. 그는 여동생은 같이 데려갈 수 있지만 정호는 안 된다고 한다. 누나는 정호도 같이 데려가야 한다고 버틴다. 정호는 스스로 입을 덜어주기 위해 몰래 고향을 떠나 경성으로 온다. 홀로 인생의 사냥꾼이 된다. 호랑이 사냥꾼인 아버지처럼.


정호는 아버지처럼 자손심이 세고 독립적이고 강인한 성격을 가졌다. 정호는 경성에서 부랑자처럼 떠돌다 거지 무리에 들어가 왕초가 된다. 이후 정호는 거지들을 이끌며 나름의 리더십을 보이며 점차 세를 확장해 간다. 정호는 우연히 기생들의 행렬에서 옥희를 보고 운명처럼 첫눈에 반한다. 이후 정호는 옥희를 만나 서로 가까워진다.


정호는 옥희를 위해 헌신한다. 옥희가 어려운 일이 생길 때면 나타나 물심양면으로 도와준다. 옥희도 기생의 과정을 마치고 점차 돈 많은 사람들의 연인이 되면서 들떠 있기도 하지만 정호를 친구로서 따뜻이 대한다. 옥희는 정호에 대해 친구로 생각할 뿐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운명적인 만남과 우정이지만 사랑으로 맺지 못한다.


옥희와 친구 연화는 기생을 넘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연예인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는다. 점차 극장에서 공연을 하거나 음반을 내을 내는 영화배우와 가수와 된다. 친구 연화는 극장 대표의 내연녀가 되면서 따로 살림을 차린다. 옥희는 돈은 없지만 외모가 수려하고 능력이 있어 보이는 인력거 청년 현철과 사랑에 빠진다.


옥희는 현철이 공부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아낌없이 지원을 한다. 현철은 옥희 덕분에 대학 졸업을 하지만 옥희가 원하는 결혼은 하지 않는다. 현철은 안동의 뼈대 있는 양반 집안의 방계로 가난하지만 자존심이 센 집안의 분위기, 어머니의 위세에 눌려 기생 출신인 그녀와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핑계일 뿐 현철은 진심으로 옥희를 사랑하지 않았다.


옥희는 결국 현철과 헤어진다. 현철은 이후 돈 많은 친일파 김성수의 자전거 수리 상에서 일을 하면서 점차 능력을 인정받는다. 그의 딸과 결혼하면서 현철은 장인의 사업을 물려받아 점점 승승장구한다. 어느새 자전거에서 자동차를 만드는 거대한 기업을 일구어 6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성공한 비즈니스맨으로 각광을 받는다.


정호는 부랑자들의 왕초에서 벗어나 옥희의 마음을 얻기 위해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한다. 해방 후 좌우이념 대립으로 사회는 어수선했다. 폭력이 빈발하던 때, 어느 한쪽에 붙어 폭력을 대행해 수고비를 받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에 좌익 세력의 대표자인 명보를 만난다. 독립운동가로 민족주의자이며, 공산주의자인 명보를 만난 정호는 그에게 감화되어 공부를 하면서 그의 심복이 된다.


정호는 옥희가 결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결국 그녀의 곁을 떠난다. 그의 스승 명보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상해로 간다. 거기서 그는 만주국을 순방하는 일본 부총독을 암살한다. 그는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오지만 일본군에 붙잡혀 강제입영을 당할 뻔한다. 다행히 소지품으로 가지고 있던 라이터가 그를 살린다. 호랑이 사냥에서 목숨을 구한 대가로 일본인 장교가 아버지에게 준 것인데, 그 라이터를 준 사람이 바로 정호 앞에 앉은 그 장교였다. 아버지 덕분에 정호는 무사히 풀려났다.


옥희는 일본의 강제 징발과 전쟁 속에 가세가 기운다. 그녀의 스승이자 후원자인 단이도 죽는다. 연화도 내연남의 딸을 낳고 무관심 속에 버려지면서 아편에 빠져 행방불명이 된다. 해방 후 정호가 사창가에 있던 그녀를 찾아내 옥희가 데려온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언니 월향이 보내온 초청 여권을 가지고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간다.


옥희를 떠난 정호는 결혼을 하고 후에 국회의원이 되지만, 과거 공산주의 활동을 한 것이 드러나 간첩으로 몰린다. 옥희가 한철을 찾아가 정호의 구명활동을 하지만, 옥희가 보는 앞에서 정호는 빨갱이 공산주의자로 망신을 당한다. 정호의 죽음으로 옥희는 충격을 받는다. 옥희가 아는 사람들 모두 그녀의 곁을 떠났다. 결국 그녀도 경성을 떠나 제주도로 간다.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인간 군상과 생존을 위한 인물들의 모습 속에서 당시의 시대상을 느끼게 해 준 작품이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 주인공들은 한탄하거나 슬퍼할 겨를도 없이 삶을 정면으로 부딪히며 살아낸다. 그래서일까 주인공들은 모두 당당했다. 사람을 대하는 따뜻한 정과 인간미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우리 선조들의 아픈 이야기다.


작가의 인물 및 상황, 심리묘사가 탁월해 머릿속으로 이야기가 그려졌다.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인물마다의 성향과 성격이 대사와 행동에 잘 드러나 놀라웠다. 사실감 넘치는 표현과 명언과 같은 대사들이 장편 소설을 읽는데 도움을 준 훌륭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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