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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간다는 것은

위화의 인생을 읽고

by 허정

길 건너 맞은편에서 어머니가 손을 흔든다.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정류장에 선 나는 어머니에게 가시라고 손짓을 한다. 손을 흔드는 어머니의 모습은 힘이 없다. 일부러 버스노선을 보는 척하며 어머니가 시선을 거두어 가길 바랐다. 얼마 후 홀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한참 보고 있으니 어느새 내 눈가는 축축하다. 두 달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사시는 어머니의 외로움이 느껴졌다.


여든이 넘은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많이 힘들어하셨다. 아버지에 대해 서운한 감정 때문인지 장례식장에서 어머니는 슬픔보다는 담담함을 보여주셨다. 50년을 같이 살았던 정은 죽음과 같이 사라지기보다 허전함과 허망함을 데리고 왔나 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일주일이 안 되어 어머니를 찾아뵈었을 때 어머니는 음식을 제대로 드시지 못했고 울렁거림으로 힘들어했다. 몸도 마음도 예전과 다르다며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는 당신도 죽고 싶다 한다.



위화의 장편 소설 ‘인생’을 읽었다. 처음에 술술 읽혀 재미로 읽다가 뒤로 갈수록 먹먹해지는 이야기에 몇 번이나 책을 읽다 말다를 반복했다. 주인공의 굴곡진 삶의 이야기가 기가 막혔다. 주인공은 자신이 겪은 지나온 인생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소설이라기보다 수기처럼 사실로 느껴졌다. 이런 인생을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중국의 국공내전, 공산당집권, 대약진운동, 문화혁명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주인공의 고초와 고난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책 제목처럼 ‘인생’ 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멋진 작품이다.


주인공 푸구이는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한량처럼 산다. 아버지가 그랬듯 푸구이도 여자와 도박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한다. 도박을 사업으로 생각하고 아버지가 말아먹은 재산을 도박으로 되찾겠다 한다. 룽얼이라는 도박사에게 사기도박을 당해 모든 재산을 잃는다. 푸구이의 아버지는 아들이 도박으로 전 재산을 잃자 충격으로 죽음을 맞는다.


푸구이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잘못을 뉘우치고 현실을 받아들인다. 먹고살기 위해 룽얼의 소작농이 된다. 비단옷을 벗고,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농사일을 열심히 한다. 자존심을 버리고 옛날 자신이 들었던 주인님이라는 말을 룽얼에게 하고 딸 펑샤에게도 시킨다. 아내 자전은 예쁘고 현명한 자로 젊은 날 푸구이가 속을 많이 썩였지만 그를 버리지 않는다. 충실하게 푸구이를 도와 열심히 농사일을 하면서 딸 펑샤, 아들 유칭을 키워나간다.




어머니의 건강이 좋지 않자 푸구이는 성에 약을 지으러 가다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강제로 끌려간다. 그는 그렇게 국공내전에 휩쓸려 2년간 사선(死線)을 넘나 든다. 간신히 살아남은 그는 해방군에 포로로 잡혔지만 풀려나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그사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딸 펑샤는 농아가 되었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은 공산국가가 되었고, 얼마 후 룽얼은 악덕 지주로 몰려 사형을 당한다. 룽얼이 죽기 전, 원래 푸구이가 죽어야 하는데 자신이 대신 죽는다고 소리친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 푸구이가 도박으로 재산을 말아먹지 않아더라면 사형당할 사람은 자신이라는 생각에 아찔했다.


푸구이는 아내와 열심히 농사를 짓지만 아내 자전이 그만 그루병에 걸린다. 푸구이는 젊은 날 자전에게 잘못한 것이 많아 지금은 자전을 아끼며 정성껏 보살펴준다. 아들 유칭의 학비가 없자 부부는 딸 펑샤를 다른 집으로 보낸다.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딸 펑샤가 집으로 다시 찾아온다. 며칠 후 푸구이는 그녀를 다시 데려다 주려다 결국 딸을 업고 다시 집으로 데려온다. 그는 함께 굶는 한이 있더라도 그녀를 보내지 않겠다 한다.


대약진 운동으로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에 빠진다.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사람들의 삶은 점차 궁핍해진다. 아들 유칭은 학교 교장선생님에게 헌혈을 하다 의료진이 너무 많이 피를 빼는 바람에 어처구니없게 죽음을 당한다. 헌혈의 당사자는 국공내전에서 만났던 춘성의 아내로, 출산하면서 피를 많이 흘려 헌혈이 필요했다. 춘성은 푸구이와 헤어진 후 해방군에 들어가 공을 많이 세워 이곳의 현장이 되었다. 푸구이는 기막힌 인연에 그를 더 이상 원망하지 않는다. 아들의 허망한 죽음을 푸구이는 혼자 자기 손으로 묻는다.



문화 대혁명으로 지식인이나 권력자들이 한순간에 처형을 당하거나 대중 앞에서 조리돌림을 당한다. 현장이었던 춘성은 사람들에게 매일 같이 치욕을 겪는다. 춘성이 자살하기 전 푸구이와 자전을 찾아온다. 부부는 춘성에게 죽지 말고 아들 몫까지 살라고 하지만 그는 자살을 택한다. 예쁘고 똑똑하지만 농아인 딸 펑샤는 머리가 기울어진 완얼시를 만나 결혼을 한다. 두 부부는 푸구이와 자전처럼 서로 아끼고 사랑한다.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임신한 펑샤가 아들을 낳다 죽는다. 문화 대혁명으로 경험 있는 의사들이 없자 푸구이의 딸도 아들처럼 그 병원에서 목숨을 잃는다


펑샤가 죽은 후 얼마 안 있어 자전도 죽음을 맞는다. 사위는 손주 쿠건을 혼자서 잘 키운다. 푸구이는 손주 쿠건이 성장할 수 있도록 사위를 돕는다. 열심히 살던 사위도 그만 사고로 죽고 만다. 푸구이는 외손자 쿠건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같이 산다. 푸구이는 나이가 먹어 일을 하는 것이 버겁지만 쿠건을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어느 날 푸구이가 일하러 나가기 전 아픈 쿠건에게 많은 콩을 삶아 준다. 쿠건은 혼자서 그 많은 콩을 먹다 어이없게 죽는다.


푸구이는 아내와 자식 둘, 사위, 외손자까지 모두 잃었다. 그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소를 사기로 한다. 도살장에서 막 잡으려는 늙은 소의 눈물을 보고 푸구이는 그 소를 산다. 푸구이가 늙어빠진 소를 사자 사람들은 비웃는다. 그는 동질감을 느끼며 소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여준다. 푸구이는 늙은 소와 함께 농사도 짓고 친구처럼 대한다. 푸구이는 소를 부릴 때 인간처럼 대하며 소가 일하게 꾀를 쓴다. 다른 소들도 일한다며 죽은 가족들 이름을 불러 소가 여러 마리인 것인 것처럼 한다.



부모님을 포함해 아내와 아들 딸, 사위와 손자까지 가족 전체의 죽음을 경험한 주인공 푸구이는 인생을 어떻게 바라볼까.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떠나보낸 살아남은 자의 충격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기가 막힌 가족들의 죽음 앞에서 삶의 의지를 키워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 푸구이는 자신과 닮은 소를 사, 반려우처럼 같이 일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산다. 살면 살아진다고 하나 그렇게 되기까지 고통과 괴로움은 어떻게 닳아질까. 주인공은 지주에서 소작농이 되었을 때 그랬듯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앞에 괴로워했지만 받아들이고 살아낼 뿐이다.


작가 위화는 ‘사람은 살아가는 것 그 자체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지 그 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젊은 날, 삶의 목적, 의미를 찾아 그렇게 실천하며 사는 것이 인생을 제대로 사는 거라 생각을 했다. 지금은 작가의 말처럼 사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다 생각한다. 인생이 뜻대로, 계획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앞에 일어난 삶의 현실을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은 없다. 순응하고 받아들이며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생전에 못 해 드리는 것이 자꾸 떠올라 마음에 걸린다. 그래서일까 홀로 계신 어머니가 더욱 마음에 쓰인다. 푸구이의 아내 자전은 죽기 전, 자식들이 죽어 마음이 아프지만 더 이상 그들에 대해 마음 졸일 필요가 없어 다행이라 했다. 살아 있을 때 둘 다 효도를 했으니 만족한다 했다. 사랑하는 두 자식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대단했다. 어머니도 자전과 같이 허한 마음을 털어버리고 밝게 사셨으면 싶다. 인생이 내 맘대로 안 되니 이것 역시 어쩌면 내 욕심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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