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신사에 두고 올 것을

오사카 여행 중에

by 허정

일본 오사카 난바로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다. 여행을 앞두고 으레 들뜨고 설레기도 할 텐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처음 가는 자유여행의 부담도 있었지만, 지진에 대한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난카이 대지진의 예언이 있었고, 학자들은 지진이 언제 일어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며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작년 말부터 올 연초까지도 크고 작은 지진 소식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 95년 고베 대지진, ’ 11년 동일본 대지진의 참혹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떠나기 일주일 전 시마네현 동부에서 지진이 났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지금 나는 것이 낫지 않나 싶기까지 했다.


뉴스에는 현지 일본인들의 도피 소식은 없었다. 혼자 괜한 걱정이었나 싶기도 하고, 5일 여행 중에 무슨 일이 생기겠냐 하는 마음으로 일본으로 향했다. 오사카를 선택한 것은 가깝고 한국인이 많이 가는 곳이라, 자유여행으로 무난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야 했기에 국내에서 오사카 여행과 관련된 많은 유튜브 영상을 보았다. 입국 수속에서부터 공항에서 고속열차를 이용하는 방법, 오사카 맛집 소개,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을 이용하는 방법, 쇼핑 물건 추천 등 다양한 자료들이 있어 도움이 되었다.




오사카의 옛 이름인 나니와(難波)는 고대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渡來人)들이 도착했던 항구였다. 이곳을 통해 우리 선조들은 불교, 건축, 조선, 천문학 등 많은 문물을 일본에 전해 주었다. 숙소가 있는 ‘난바’라는 이름도 ‘파도가 거친 곳’이라 뜻의 나니와에서 유래되었다. 세토내해의 거센 바닷물과 요도강에서 내려오는 민물이 정면으로 충돌해 높은 파도가 일어 뱃사람들이 파도를 헤쳐 나가기 어렵다는 의미로 난파(難波, 나니와/난바)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한다.


비행기로 편하게 와서 몰랐지만, 지역명의 유래를 알게 되자 우리 조상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 당시 일본의 중심지인 나라나 아스카 지역으로 가기 위해 우리 조상들은 거친 파도를 헤치고 이곳 오사카에 온 것이다. 당시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고립되지 않기 위해, 외교적 생존전략으로 선진문화와 기술을 일본에 전해 줌으로써 일본을 아군으로 포섭하려 했다. 교과서에서 우리의 선진 문물을 일본에 전해 주었다는 단순한 문장 이면에 우리 조상들의 목숨을 건 용기와 뛰어난 항해술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로웠다.


오사카 지명의 유래를 알게 된 후 지진에 대해 겁을 먹은 내가 부끄러워졌다. 사실 간사이 공항에 도착하면서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지진 걱정은 할 틈이 없었다. eSIM으로 바뀐 스마트폰이 제때 작동이 되지 않고, 국내에서 웹을 통해 사전입국심사 정보를 등록했는데 잘못 입력되어 당황했었다. 친절한 공항 직원이 눈치껏 상황을 파악하고 옆에 붙어서 스마트폰을 자기 것처럼 만지며 일사천리로 해결해 주었다.


공항을 무사히 빠져나와 난바역까지 잘 왔는데 역을 나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공항에서 당혹스러움이 재현되었다. 한참을 헤매다 간신히 역에서 나왔다. 숙소까지의 길은 구글맵의 라이브 뷰 기능을 활용했다. 카메라로 주변을 보여주면 증강현실 화살표가 나와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국내의 길 찾기 앱에서는 본 적이 없어 신기했다. 1,500년 전 도래인들은 길 찾기 앱도 없이, 언어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 찾아와 기술을 전해 주었다는 것이 신비하게 느껴졌다



우리의 여행 일정은 유튜브에서 추천하는 평범하고 무난한 일정이었다. 유니버설 재팬 스튜디오에서 하루를 놀고, 한국인 가이드가 인솔하는 나라, 고베의 관광지와 교토의 관광지를 관광버스로 다녀오는 것이었다. 오사카에서 쇼핑만 할 수 없어 쉽게 이동할 수 있는 패키지 상품을 구매했다. 아침 8시경 전세버스를 타고 출발해 저녁 6시경에 도착하는 것인데 가이드 말로는 이런 일정을 소화할 수 있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오직 한국 사람밖에 없다고 한다. 여행지의 대표적인 곳에 가서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고 열심히 사진을 찍고, 언제 또 오겠냐며 최대한 많은 곳을 돌아보려는 욕구를 만족시켜 주는 한국인만의 관광상품은 유효했다.


패키지 상품에 따라 가장 먼저 간 곳은 나라시에 있는 동대사였다. 나는 이 절에서 충격을 받았다. 지금은 일본이 우리보다 앞선 나라지만 과거 우리나라는 문화적으로 일본에 우월했다고 생각했다. 동대사의 청동으로 만든 15m 대불과 대불전의 크기는 한국의 사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컸다. 대불전 안의 여러 개의 기둥과 높은 보는 마치 서양의 신전을 보는 듯했다. 일본인의 작고 왜소했던 과거 이미지를 생각하면 당시 이렇게 큰 규모의 사찰을 지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AI를 통해 알아보니 8세기 일본의 전염병, 기근, 반란 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성무 천황이 진국불교(鎭國佛敎) 사상을 내세워 국가적 차원에서 이 절을 건립했다고 한다. 그 당시 일본 기술로 이 건물을 지을 수 없었을 것이라 확신하고 검색을 해봤다. 아니나 다를까 백제와 신라 출신 도래인들이 설계하고 건축했다는 말에 그럼 그렇지 하고 자부심이 일어났다. 그렇다고 해도 일본이 당시 이렇게 큰 규모의 사찰을 짓는 데 필요한 돈과 인력을 조달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일본을 무시해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다음 날 교토의 덴류지 정원과 금각사를 방문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덴류지는 14세기 조경의 대가 무소 소세키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당시의 모습을 지금까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뒤로 보이는 아라시야마 산이 덴유지 정원과 잘 어우러져 함께 있는 듯했고 전체적으로 정갈하고 깔끔해 보였다. 금각사에 갔을 때도 그런 인상을 받았다. 쿄코치(거울 호수)에 비친 금각사 건물의 주변은 너무나 잘 다듬어져 하나라도 건들면 안 될 것 같았다. 금으로 입힌 사리 전과 주변의 나무가 호수에 비춰 물속에도 금각사가 있는 듯했다. 관광객들은 앞다투어 그 장면을 사진에 담으려 했다.


일본에 가면 흔하게 보는 것이 신사다. 이번에도 여행지에 있는 신사를 여럿 갔는데 교토의 후시미 이나리 신사(여우 신사)를 방문했을 때 제사를 올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양복을 입은 직장인들 10~20명이 단 아래의 의자에 앉아있었고, 신관이 안에서 음식을 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연초라 회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기원에서 하는 예식 같았다. 언뜻 보면 우리나라의 제사와 비슷하게 보였다. 우리나라는 조상신을 모시지만, 신사는 지역의 수호신이나 자연신 등 여러 신들을 모신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신의 주의를 끌기 위해 박수를 친다고 하는데, 엄숙한 분위기에서 조상신을 모시는 제사와는 결이 다른 것 같다.


가이드는 신사 앞에 가서 동전을 내고 신년운세를 뽑을 수 있다고 했다. 안 좋은 글귀가 나오면 오히려 좋다고 한다. 액운을 미리 알았고 그 액운을 옆에 있는 함안에 묶어 두면 액운이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연재해로 인한 인명 피해가 심하고 언제 어떻게 닥칠 불운을 관리한다는 측면에서 나름 현명하게 느껴졌다.




저녁마다 숙소 부근의 도톤보리나 센니치마에에 있는 상가에 갔다. 늦은 시간 불야성을 이룬 식당이나 상가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붐비고 있다. 도톤보리의 글리코상 앞에서 사람들은 같은 포즈인 Y자를 들고 사진 찍기에 바쁘다. 어디에 가도 한국어를 들을 수 있었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한국이 일본의 경제를 따라잡았다고 하지만 관광지마다 수많은 관광객과 일하는 외국인들을 보면 과거 누렸던 영화가 아직도 계속되는 것처럼 보였다.


여행 중에 지진은 없었다. 과거 일본의 식민지 통치로 큰 상처를 받은 우리에게 일본은 못마땅한 존재다. 여전히 앙금이 가시지 않은 상태로 일본의 지진 소식을 들으면 곱지 않은 그들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 모르는 길을 물어봤을 때 상점 밖까지 나와 자기 일처럼 도와준 일본인 직원, 식당에서 일하는 한국인 여직원과 현지 한국인 가이드를 보고 나서는 일본에 큰 지진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사라졌다. 그들도 모두 나와 같이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기에 무탈하게 살아갔으면 싶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여우 신사에 지진 액운과 일본에 대한 미움을 묶어두고 올 것을 후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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