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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렁한 시장과 사람냄새

by 허정


저녁에 요리하다 손가락에 화상을 입었다. 화상 약을 사기 위해 약국을 찾았다. 길찾기 앱에는 이미 많은 약국이 문을 닫았다. 마침 사택 건너편의 시장 쪽에 영업 중이라고 표시된 약국이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가면 약을 사지 않을까 싶어 옷을 대충 주섬주섬 입고 나섰다. 가서 보니 그 약국도 문이 닫혀 있었다. 인근의 약국도 마찬가지였다. 시장 부근의 오래된 약국이라 관리가 안 되었나 보다.


하는 수 없이 다른 약국을 찾아 걸었다. 시장 옆쪽으로 지나치는데 옛날 어렸을 때 봤던 시장 분위기가 느껴졌다. 길 한편으로 옷 가게, 그릇 가게 등 여러 상가가 있었다. 진열장을 통해 상가 안에 전시된 물건은 많았다. 정작 살 사람과 팔 사람이 없었다. 행인은 나밖에 없었다. 여러 상점을 지나치면서 황량한 분위기에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모두가 사라진 영화 속의 한 장면이라고 할까.


시장길을 지나 길을 걷다 보니 유독 잘되고 있는 상가가 눈에 띄었다. 가성비 좋은 물건을 판매하는 점포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혹시 화상연고가 있을까 싶어 들어갔다. 방금 지나쳐 온 시장 상가에는 없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곳에 모인 것 같았다. 쾌적한 매장에 초저가 물건이 없는 것 없이 알차게 진열되어 있고 사람들은 북적거렸다. 시장에서 장을 보는 것보다 동선이 짧고 물건을 찾기에도 편했다.



초등학교 때 우리 집은 시장 근처에 있었다. 시장길을 지나 학교에 가기도 하고,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시장을 지나칠 때면 사람들이 많아 곧잘 부딪히곤 했다. 다양한 물건들에 눈이 팔려 사람을 보지 못했기도 했지만 원체 사람들이 많다 보니 곧잘 부딪혔다. 시장은 언제나 북적거렸다. 저녁을 먹고 시장에 나가도 불이 켜진 상가가 꽤 많았다. 소화도 시킬 겸 어머니와 같이 옷도 사고 과일도 사기도 했다.


늘 붐비던 시장은 그만큼 소란스러웠다. 사방에서 떨이라고 하는 호객 소리와 가격 흥정이 의견이 맞지 않아 고객과 상인 간의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물건을 파는 상인들끼리 서로 자리를 넘어왔다고 시비가 붙기도 했다. 치열한 삶의 현장을 보는 듯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가끔 시장을 가보라고 했다. 새벽부터 나와 하루 종일 물건을 팔기 위해 열심히 사는 상인들의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아 보라는 것이다.

물건이 많지 않고 물건을 살 수 있는 유통채널도 한정적이었던 그 시절,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에는 없는 물건이 없었다. 닭을 즉석에서 잡아서 튀겨주기도 했고, 그릇, 옷, 신발, 장난감, 액세서리, 가구 등 일상에서 필요한 물건이 모두 있었다. 소득이 늘면서 물건이 고급화, 브랜드화되면서 품목별로 전문 매장이 등장했고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시장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시장은 나이 든 사람들만 찾아가는 곳으로 전락하였다.

요즘 전통 시장에 가면 젊은 사람이 장사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시장은 젊은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한 터전이 될 수 없는 것인지 4~50대의 상인만 있다. 젊은 사람들이 물건을 사러 오지 않아서일까, 젊은 사람들이 장사하지 않아서일까. 시장도 늙어가고 있다. 시장을 현대화한다고 기존 시장을 리모델링하고 주차장을 만들어 환경을 쾌적하게 한다고 하지만 예전만큼 되는 것은 요원한 일인 것 같다. 너무나 흔해진 물건은 대형마트, 편의점, 인터넷 등을 통해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고 소비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젊은 세대의 요구를 소구 하기에 역부족인 것 같다.


이제는 대형마트도 점차 녹록지 않다. 온라인 플랫폼이 발달하고 배송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 굳이 마트도 가지 않는다. 전날 주문하면 다음 날 아침 물건을 받을 수 있으니 점차 집 밖에서 물건을 사는 일이 줄어들고 있다. 불과 10년까지만 해도 주말마다 애들을 데리고 마트에 가는 게 주말 행사였다. 마트 내 시설에서 애들과 놀고 점심을 해결했다. 맞벌이 부부로서 한 주의 먹거리를 사 오고 여가를 해결할 수 있었으니,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었다.


지난해부터 아내는 마트에 가지 않는다. 스마트폰으로 모든 물건을 샀다. 나 역시 책부터 옷, 컴퓨터, 오디오, 스마트폰 화면보호기 등 웬만한 물건을 인터넷으로 샀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다. 이번 쿠팡의 해킹 사건으로 알게 된 쿠팡의 가입자 수가 3천370만 명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성인 인구의 3분의 2가 가입했다고 하니 고령층을 제외한 모든 국민이 온라인으로 구매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수산물 시장에 갔다. 수족관의 싱싱한 해산물을 보면서 이곳저곳을 지나다 제철인 전어가 눈에 들어왔다. 전어와 굴, 낙지를 샀다. 전통 시장에서 물건을 사다 보면 덤으로 더 주거나 깎아주는 것이 관행처럼 느껴져, 스스럼없이 깎아달라 했다. 상인은 안 그래도 그렇게 해 주려고 했는지 바로 몇천 원을 깎아주었다. 마트나 온라인 구매에서도 할인 제도가 있지만 융통성이 없다. 사람끼리 흥정을 통해 깎을 수 있어 정을 느낄 수 있다.


시장에 그 많던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전부터 일어났고 지금도 진행 중인 현상이지만, 우연히 마주친 저녁 시장 상가의 황량한 모습은 생각보다 심각하게 와닿았다. 어릴 적 추억 속에 묻어 있던 붐비던 사람들이 인상적이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자동화, 스마트화, AI로 진화되어 가면서 물건도 많아지고 사는 것도 편해졌다. 굳이 시장이나 마트로 가지 않아도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인간의 역사 속에 자연스럽게 생성되었던 시장과 도심 상권은 옛말이 되고 있다. 모여 있어 시너지가 나는 그런 시대가 더는 아닌 것 같다.


주말에 새 아파트가 몰려 있는 신도시 상가에 갔었다. 지방의 소도시로 형성된 지 얼마 안 된 곳이었다. 그곳의 상가 80% 이상이 식당, 치킨집, 커피숍 등 먹는 음식점이었다. 물건을 파는 상가는 없었다. 이제는 장사에서 돈을 벌 수 상가는 음식점밖에 없는 것 같다. 도심 상권도 시장처럼 성장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붐볐던 시장이 내 추억의 한 자락 속에 있는 줄 몰랐다. 요즘 들어 사람들이 어우러져 치열하게 살던 그 시대의 사람 냄새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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