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집을 생각하며
얼마 전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어머니의 집을 사려는 사람이 가격을 깎아 달라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것이었다. 지난해 4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되신 어머니는 힘들어하셨다. 집을 관리하는 것도, 일상생활을 하는 것도 버거워하셨다. 어머니는 성당 어느 자매님께 받았다며 양로원 카탈로그를 보여주셨다. 아버지의 부재로 집은 더 휑해 보였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방이나 마루는 더 커져 보였다. 커진 집에 혼자 계시는 어머니가 걱정되던 차였다. 양로원에 전화를 했다. 며칠 후 어머니는 그곳에서 생활하기로 하셨다.
작년 여름은 엄청나게 더웠다. 양로원에서 어머니의 식사와 건강관리를 해주었고 연락을 해주니 안심이 되었다. 혼자서 식사와 약을 챙겨 드시고 일상생활 하시는 것이 걱정되었는데 양로원에 계시니 모든 걱정이 일시에 해소되었다. 문제는 어머니가 적응하시는 것이었다. 입소하신 지 일주일도 채 안 되어 집에 가시겠다고 연락이 왔다. 처음 3개월은 적응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며 가급적 연락을 자제해 달라는 시설 관계자의 당부가 있었다.
40년을 넘게 살았던 집을 떠나 낯선 공간에서 생활하시려니 어머니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익숙한 방안의 옷장과 침대, 햇빛이 들어오는 창문, 평생 밥을 지었던 압력솥과 식기 등을 뒤로한 채 입소하셨을 때 심정은 어떠했을까. 새로운 공간에서 손길을 나누고 손때가 묻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머니는 수시로 전화해 집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어린애 달래듯 날씨가 무척 더워 집에서 생활하시기가 어려우니 선선해지면 집으로 모시겠다는 핑계를 댔다. 적응의 시간을 벌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마음 한편으로는 모시지 못하는 상황이 죄송스러울 뿐이었다.
석 달이 지나 어머니는 집을 부동산에 내놓으라고 하셨다. 앞서 아버지가 주변을 정리하셨듯 어머니도 그러시려는 것인지 나와 동생에게 집을 팔려고 하셨다. 부동산 경기가 좋지 않아 한 참 동안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은 없었다. 6개월이 지나 마침 작자가 나타났다. 동생과 얼마를 깎아야 할지 이야기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동생의 목소리에 힘이 없어 보였다. 동생에게 무슨 일 있냐고 하니, 막상 부모님이 사셨던 집을 판다고 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매수자가 없어 팔 수 있을까에만 매몰되었던 나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생의 말만 따라 부모님과의 추억이 묻어 있는 집인데, 이제는 그 집에 들어갈 수 없다는 현실이 피부로 와닿았다.
지금의 4층 다세대 주택은 부모님이 2003년에 다시 지으신 집이다. 1985년에 처음 이사를 왔을 때의 집은 70년대 지은 이층 집으로 낡고 오래되었다. 마당에 라일락 나무가 있었는데, 5월경 꽃이 피면 라일락 향이 퍼져 대문에 들어설 때면 기분이 좋았다. 라일락 나무 옆으로 계단이 있었고 옆에는 낮은 단이 있어 항아리를 놓고, 빨래를 널 수 있었다. 담이 낮아 누구나 쉽게 넘어올 수 있었는데 우려와 달리 도둑이 들어온 적은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가면 넓은 베란다가 있었다. 베란다 옆쪽으로 빨래를 널 수 있었고 자그마한 골방이 있었다. 그 방에서 공부도 하고 베란다에서 줄넘기도 했다. 여름이면 돗자리를 깔고 더위를 피하기도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직장에 들어가기까지 진학과 취업의 아픔과 기쁨이 서려 있었다. 그 추억 속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젊고 활기찼었다.
그 집을 허물고 다시 지은 집이 현재의 집이다. 언제부터인지 어머니는 새로 집을 지어야겠다고 하셨다. 집이 오래되어 손 볼 것도 많고 낡아서 세를 받기도 어렵다 하셨다. 당시 집은 아래층에 5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어머니는 돈의 가치가 떨어지니 돈이 있을 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셨다. 2003년 봄에 정들었던 옛집을 허물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지 못하게 집 근처에 오지 하지 말라고 하셨다. 어디서 들으셨는지 살던 집을 허무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지 않다고 하셨다.
늦가을에 새집으로 이사했다. 새집은 4층이었다. 3층까지 세를 주고 4층에 부모님과 우리 가족이 살 수 있도록 지어졌다. 예전의 집은 현관을 나서면 밖에 넓은 베란다가 있었는데 새집은 베란다가 실내로 옮겨와 답답했다. 다세대 주택의 변화에 맞게 아파트처럼 계단을 두고 양쪽에 두 세대씩 살 수 있도록 했다. 뾰족 지붕이 있고 마당으로 햇빛이 들던 옛집과 달리 사각형의 새집은 폐쇄적이었다. 건축도 유행을 타는 것처럼 다른 집들도 다 그렇게 집을 지었다. 어머니는 나와 동생이 결혼해서 아래층에 같이 사시는 것을 꿈꾸셨다. 새집에서 석 달도 못 살아보고 나는 승진과 함께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지방에 내려온 내가 결혼해서 터를 잡는 바람에 어머니의 바람은 이루지 못했다. 명절이면 누나와 매형, 매제, 손주들이 올라왔고, 나이 또래가 비슷한 조카들과 우리 애들은 연극을 하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흉내를 냈다. 그 모습에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셨다. 지방에서 올라온 가족들을 부모님처럼 집은 따뜻하게 포용했다. 마루에 14명이 둘러앉아 차려진 상에 앉아 식사를 했다. 어머니는 빠진 음식이 없는지 열심히 부엌을 왔다 갔다 하셨고, 식구들이 다 같이 모여 식사하는 모습에 아버지는 기분 좋게 약주를 드셨다.
어머니를 모시고 계약하러 갔다. 매수자는 여러 집을 보러 다녔지만 돌다 보면 우리 집만 한 것이 없다 했다. 오래된 건물이지만 튼튼하고 빨간 벽돌로 집이 예쁘다고 칭찬했다. 우리 집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 아버지가 고생해서 지으신 집에 대한 가치를 알아주어 작자를 만난 것 같다. 어머니는 말이 없으셨다. 부동산을 나오면서 어머니께 기분을 여쭈었더니 마음이 안 좋다고 하셨다. 영원한 것은 없지만 즐겁고 때로는 힘들었던 추억이 담아져 있던 집을 팔고 나니 나 역시 허전한 마음이었다.
서울에서 30년 넘게 살다 지방에 터를 잡고 산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서울을 떠났지만, 부모님이 계신 서울이 멀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항상 서울에 가면 반갑게 맞이하는 분이 계셨고 받아 줄 나의 옛 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서울은 고향으로 남을 것 같다. 받아 줄 곳이 없는 낯선 곳이 되어가는 것 같다. 집은 삶을 살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지만 그 공간 속에 희로애락의 추억과 포용의 따뜻함이 담아져 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쓴 ‘남아있는 나날’이라는 소설에서, 최고의 집사로 달링턴 홀에서 평생을 지낸 주인공 스티븐스는 여행 중에 집사 출신의 어느 노인과 대화를 나눈다. 스티븐스는 집사로서의 지난 삶에 대한 자부심과 후회를 이야기한다. 이때 그 노인은 하루의 일을 끝냈으니 다리를 쭉 뻗고 즐기라며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한다. 어머니도 하루 중 가장 좋은 때인 저녁에 사신다. 우리 가족을 담았던 그 집에서 많은 애경사가 있었고 무탈하게 우리 가족은 잘 지내었다. 어머니가 그 추억을 삼아 즐기셨으면 싶다. 머지않아 나에게도 저녁이 찾아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 집을 추억 삼아 즐겼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