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정 Apr 20. 2022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

큰애의 병을 통해 얻은 깨달음

 주인 없는 교복만이 옷걸이에  걸려있었다. 가슴에 붙어있는 빳빳한 이름표와 달리 소매는 축 늘어져 있었다. 덩그렇게 걸려있는 큰애의 교복을 보고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한창 뛰어다닐 나이인데 도대체 무슨 일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입학 즈음 코로나 확진으로 고생하다가 장염까지 걸려 음식을 먹지 못했다. 먹은 게 없어 힘에 부쳤는지 학교에서 쓰러진 것만 해도 서너 차례였다.

      

 처음에 입원했을 때 검사 결과는 이상이 없었다. 나흘 동안 입원해서 이제는 곧 나아지겠거니 생각하며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퇴원했지만 이후에도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집이나 학교에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주 토하니 한 달 새 5kg 이상 살이 빠져 기력이 없었다. 이런 몸 상태로 학교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퇴원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아내의 흐느껴 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또다시 입원을 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한창 좋은 나이, 건강할 나이에 음식 하나 소화시키지 못하고 저렇게 힘없이 쓰러져 친구 등에 업혀서 오다니,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할 노릇이다. 별거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행동했지만 머릿속은 온통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젊은 시절, 충북 음성 ‘꽃동네’에 가서 봉사를 한 적이 있다. 성당 청년봉사 활동의 일환이었다. 다 같이 함께 가는 것이어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나섰다. 큰 건물, 잘 다듬은 조경과 달리 건물 안에 나이 드신 환자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돌보는 가족도 없이 앙상한 모습으로 병상에만 누워있는 어르신들을 보니 낯설고 섬뜩했다. 모르는 봉사자의 손에 의해 거동하고 생활할 수밖에 없는 그분들을 보면서 한없이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마주하게 되었다.  

     

  언제 죽음이 와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이는 핏기 없는 얼굴에서 외로움과 고통에 지친 힘없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역동적이고 생기발랄한 환경 속에 있다가 삶의 끝자락에 와있는 이곳 풍경이 낯설고 어색했다. 음습한 분위기에 눌려 어찌할 바를 몰라 이일 저일 시키는 일만 하면서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무더위와 역한 냄새는 봉사 기간 내내 뒤따라 다녔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꽃동네 표지석에 쓰인 글이다. 자신의 몸도 불편한 최귀동(베드로) 할아버지가 동냥을 해가며 얻은 음식을 자신보다 못한 걸인에게 나누어 주는 모습을 보고 오웅진 신부는 꽃동네를 세우게 된 것이라고 한다.    

 

 도대체 무엇이 축복이고 은총인지 혼란스러웠다. 빌어먹는 삶도 비참한데 그 힘마저 없는 사람은 어떤 은총을 받았을까? 혼자의 힘으로 생활할 수 없는 것이 감사할 일인지 모르겠다. 봉사 일과가 끝난 저녁, 다들 감사하다고 경쟁하듯  말하고 있었다. 억지로 감사함을 찾아보려고 했다. 저기 누워있는 사람보다 젊고 건강해서 스스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당연한 것이라고 여길뿐 감사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반감이 일어났다. 상황이 안 좋은 사람과 비교해서 그보다 나 것을 하느님 은총이고 감사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 가장 비참하게 사는 사람은 누구를 보고 감사해하고 은총이라고 느낄 수 있다는 말인가?      


 입원한 날 저녁 아들을 면회하러 갔다. 밥도 못 먹고 힘없이 휠체어에 앉아있는 아들을 보며  쓰러졌어도 다친 데가 없으니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엄마, 아빠가 낫게 해 줄 테니 마음 편하게 지내라고 했다. 아내는 병실 내 크론병에 걸린 또래 아이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먹고 싶은 음식을 못 먹어 애가 울고불고한다는 것이었다. 순간, 그 아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큰애에게 너는 그 정도는 아니니까 감사하라고 말했다.   

  

 병명을 듣고 상대보다 나은 상태를 보고 감사하라고 말하는 내 모습에서 꽃동네 봉사활동을 하던 그때가 떠올랐다. 주님의 은총과 감사를, 이웃의 고통과 비교해 그보다 나은 자신의 상태를 보고 자위하는 것으로 느껴져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정작 시간이 흐른 지금 나도 그때 감사하던 사람들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몇 해 전 감사의 중요성, 감사의 효과에 대해 수녀님 강의를 들었다. 감사하면 행복 호르몬이 분비되어 건강해지고 행복감을 느끼며 긍정적이 된다고 했다. 또 겸손해지고 인간관계가 좋아진다는 것이다. 최근 성공과 자기 계발을 위해서 감사일기를 쓰는 것이 좋다는 말이 있어 따라한 적이 있다. 앱을 다운로드하여 매일 3-4개씩 작성해서 열흘 정도 애들과 공유했었다.     


 억지로 감사 거리를 찾아 입력해서인지 오래가지 못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감사가 아닌 피상적인 것이어서 한계가 있었다. 아픈 아들을 보면서 우리가 밥 잘 먹고 멀쩡히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루하루 사는 것이 그냥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변에 감사할 일이 너무 많았다.


 젊은 날 비참하게만 보였던 꽃동네의 노인들도 그냥 살아갔던 것이 아니었다.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스스로의 힘이든 남의 힘을 빌리든 주어진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은총이었을 것이다. 젊고 오만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되었을 때야 비로소 감사할 줄 알았던 철부지 모습이 부끄러웠다.


 감사하는 마음은 나 자신의 힘을 빼야 생기는 것 같다. 나로 꽉 차 있고, 소유의 관점에 머물러 부족한 것에만 집중한다면 감사하는 마음은 일어날 수 없는 것 같다. 나약함을 인정하고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며, 언제 어떤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삶의 모습을 알았더라면 나로 꽉 차 있는 오만함이 빠졌을 것이다. 나에게 없는 것보다 이미 가진 것에 집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진다면 일상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충만할 것이다.   

  

  퇴원한 아들은 다시 학교에 다니고 있다. 전보다 상태가 호전된 것 같아 감사하다. 이제는 밥을 먹고 소화시키는 것만으로도 주님의 은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병이 걸린 후에 건강의 소중함을 생각하고, 난세가 된 후에 태평 시절이 복임을 알면 앞을 내다보는 지혜가 없다. 행복을 추구하면서 그것이 재앙의 근본임을 자각하고, 삶을 탐하면서 그것이 죽음의 원인임을 깨닫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뛰어난 식견이다"라고 채근담에 나와있다.  젊은 날 받아들이지 못했던 주님의 은총과 감사가 채근담의 글귀와 함께 가슴에 와닿는다.

작가의 이전글 봄꽃이 주는 선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