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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에 열심이시다

미국일기_할머니 되는 나날

by 올리

출산하는 딸 도우미 하러 미국에 와 있는 나, 자전거 타기에 흠뻑 빠져있다.


자전거 타기, 초등학교 때 배운 후 몇 번이나 탔을까.

어른 되어서 탔던 기억은 중국 시안 갔을 때 도성 성벽 위를 자전거로 돌았던 기억이 있다. 시안, 그 여름에 너무 더웠다. 성벽에 올라 더워서 쩔쩔매고 있을 때 서양 여자가 치맛자락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얼마나 시원해 보이던지... 자전거 대여소를 찾아 자전거에 훌쩍 올라탈 용기가 생겼던 것은 오직 시안의 그 더위 때문이었다. 네모난 성벽 위에서 직진 후 좌회전 두어 번에 끝난 일이었지만 울퉁불퉁 돌바닥 때문에 바로 후회를 했던 기억이 있다.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따릉이'에도 타 본 경험이 있다. 후배의 강권으로 도전해 보았는데 며칠간 끙끙 앓았다.


그런 내가 매일 자전거를 타겠다고 결심했던 이유는 딱 하나, 산후조리 도와주러 미국까지 온 친정엄마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데 어떻게 하나.. 걱정하다가 찾은 대안이었다. 매일 1시간, 자전거 타는 시간을 허용한다는 약속을 딸과 미리 해 두고 여기에 왔다. 그 약속은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다.


우리 사위는 본업을 바꾸어 자전거 관련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자전거를 좋아한다.

이 집엔 자전거가 여러 대 있는데 전문 장비들도 가득하다. 딸 내외는 결혼 예물 살 돈으로 브롬톤 자전거 2대를 새로 구입하였다. 접어서 들고 다닐 수 있는 장점이 있는 이 자전거를 둘이 유럽에서 여름을 보내야 했을 때, 서울에 왔을 때, 그리고 엊그제 떠난 사위의 독일 출장길에도 브롬톤 자전거는 함께 하고 있다. 사위는 출근길에도 가끔 이용할 정도이지만 딸의 브롬톤은 완전 휴업 중이다.

딸의 자고 있는 그 브롬튼을 내가 애용하기로 한 것.


3월 중순 여기 와서 자전거를 탈 때는 집안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형편될 때를 보고 나갈 수 있었지만, 요즘은 아침 8시가 되면 무조건 나간다. 딸과 아기의 아침 루틴이 잡혔고, 이때보다 늦어지면 기온이 올라가 힘들어진다. 그래서 아침에 눈뜨는 대로 슬그머니 나가는데, 그렇게 나갔다가 와도 집안이 한 밤 중인 듯 고요할 때가 많고, 또 딸의 아침이 시작되었어도 나 없는 그 잠깐 동안은 지낼만하므로 '무조건 나가기'를 잘했다고 매일 생각한다.


나는 '자전거를 탄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냥 '탈 줄은 안다' 정도의 실력이었다.

딸의 자전거를 타겠다고 한 것도 바퀴가 작으니 만만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자전거를 타는 첫날, 사위가 새 헬맷을 꺼내주었다. 그래, 헬맷은 꼭 써야지!

그러고는 서울서 들고 온 패션 선글라스를 척 쓰니 사위가 '잠깐만요' 하고는 고글과 마스크도 챙겨 내왔다. 마스크는 딱 버프 모양이었다. 귀에 걸 수 있는 구멍이 있어서 눈 아래 얼굴 전체를 가릴 수 있었고, 얇은 재질이라 숨 쉬기도 좋았다. 내게 딱 필요한 물건들이었다.


며칠간 반팔 셔츠를 입고 나갔었다. 바지야 뭐, 운동복 요량으로 긴 바지 2개를 갖고 와서 괜찮았는데 팔이 걱정이었다. 딸에게서 긴소매의 옷을 얻어 노출을 가리고 나니 두 눈 빼고 다 가려졌다. 그런데 이번엔 손등이 문제였다. 정말 놀랍게도 단 며칠 사이 핸들을 잡았던 손등이 새까매졌다. 그래서 라이더용 장갑도 샀다. 그러고 나니 텍사스의 태양을 대비한 완전 무장이 완성되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된 내 모습을 셀카로 찍어보았다. 사진 속엔 멋진 헬멧(사위가 아내에게 선물한다고 고르고 고른 것이라고 했다)에 고글, 마스크, V 사인을 하고 있는 장갑 낀 손까지... 근사해 보였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는 나의 모습은 복장 대비 아쉬움이 많았다.


출발하거나 멈출 때는 주춤주춤, 좌로 또는 우로 방향 전환도 자유롭진 못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혀도 참고 달려야 할 만큼 두 손을 핸들에서 떼지 못했다. 그런 형편인데도 내가 매일 신나게 자전거를 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 동네 환경 덕분이다.


여기 딸이 사는 곳은, 현관 밖으로 나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앞마당 풀 뽑기를 하거나 하염없이 걷는 일뿐인 그런 곳이다. 허허벌판에 주택단지가 널리 형성되어 있는데 슈퍼나 카페 같은 상업시설이 없는 100% 주거지역이다. '행인'의 개념이 거의 없고, 아마존 배달하시는 분들이나 걷기 운동하시는 분들이 아주 드물게 지나는 정도. 널찍한 도로는 늘 텅 비어있고, 밖에 나와 노는 아이들도 없다. 도로를 달리는 차들은 대부분 주민들 차량이라서 내 자전거가 보이면 멈춰서 기다려 준다. 안 그래도 되는데... 늘 황송하다.


이렇게 안전한 환경에서 가끔 무안해질 때가 있었다.

바로 사람들과 마주칠 때이다. 사람들은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끼고 걸어도, 개와 산책하는 중이어도 꼭 내게 가벼운 손인사를 건넸다. 나도 같이 인사를 해 주어야 하는데 핸들에서 손을 떼지 못하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활짝 웃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런데 고개를 숙이는 인사라니... 마스크로 가려서 보이지도 않았을 웃음까지... 맞지 않는 행동들이었다.


몇 번 마주친 동네 꼬마가 있다. 그 아이랑 처음 마주쳤을 때는 나도 모르게 헛헛 웃음이 나왔다.

초등학교 3학년이나 되었을까. 새까만 얼굴, 작은 키의 멕시코계인 듯한 그 아이는 성인용 일반 자전거를 탔다. 어린아이의 짧은 다리로 페달을 힘껏 누르느라 거의 서서, 춤추듯 몸을 좌우로 흔들며 페달을 밟는다. 커다란 자전거에 올라탄 그 아이는 헬맷도, 고글도, 마스크도, 장갑도 없다. 쓔웅하고 나의 맞은편에서 달려오며 손을 흔들며 지나치고는, 다시 돌아와 내 옆을 나란히 지나며 또 한 번 손을 들어 인사를 하는데 나는 손 하나 까딱 못하고 그가 어디로 어떻게 오든 계속 전진만 할 뿐이었다.


그런 나도 요즘은 많이 달라졌다.

사람이 마주 오면 '하이' 혹은 '굿모닝'이라고 말하면서 손도 까딱한다.

여전히 핸들에서 손은 떼지 못하지만, 핸들을 잡고 있는 오른손의 네 손가락, 즉 두 번째부터 새끼손가락까지를 살짝 들어주면 그게 바로 손 인사다. 소심하기도 하고 건방져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런대로 잘 통한다.


와장창 크게 넘어지기도 했다. 커브를 돌면서 같은 장소에서 두 번씩이나 나가떨어졌다. 팔다리 여기저기 멍이 들고 피 흘린 정강이엔 상처 자국이 남았다. 절뚝거리며 집에 들어왔는데 다음 날 아침 다시 자전거를 타러 나가는 나를 보고 딸이 놀랐다. 일부러 넘어지고 싶지는 않지만 나의 자전거 실력이 늘고 있다는 증표 같아서 상처마저 기분 좋게 생각되었다.


눈으로 봐선 잘 모르겠는데, 막연히 나의 넓적 다리가 굵어졌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다. 허리건강도 좋아진 느낌이다. 사실 아기를 안았다가 내려놓았다가 또다시 들며 그렇게 반나절 이상 서성이다 보면 허리 펴는 일에 '끄응' 소리가 절로 난다. 안 그래도 부실한 허리가 더 나빠질 거라고 걱정했는데 그럭저럭 견딜만하다. 아무래도 자전거를 열심히 탄 덕분인 듯하다. 매일 피곤해지는 심신이지만 자고 나면 다시 리셋이 되고 있다.


스트레스...

걱정했던 대로 이곳 생활에서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도 매일 자전거 타면서 씻어냈다. 딸네 집에서 가출하고 싶을 만큼 마음이 크게 상한 때도 있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 자전거를 타러 나갔는데 점심때가 지나서야 돌아왔다. 반은 가출하는 마음이었지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엉긴 마음이 풀릴 때까지 이 동네 저 동네를 빙빙 돌다 보니 시간이 그렇게 지났던 것이다. 속상했던 마음은 글을 쓰면서 풀어내기도 했지만, 새 마음을 들여놓는 데는 자전거 탈 때 만날 수 있는 시원한 바람만 한 것이 없었다.


나는 자전거 타기가 이렇게 즐거울 줄은 몰랐다.

내가 여기에 '자전거 타기 전지훈련' 하러 왔나 싶을 정도로 열심인 사람이 되었다.

잘 지낼까 나를 염려하시던 사돈 내외도 내가 자전거 타는 즐거움으로 지내는 것을 보시고 안심하셨다.


산후조리 도와주는 친정엄마의 역할도 이제 곧 끝난다.

나 살던 곳으로 돌아갈 때까지 며칠 남지 않은 나날, 더욱 열심히 신나게 타야겠다.


아... 서울 가면 많이 그리워질 것 같다, 휘휘 자전거 타던 이 시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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