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리도 같은 감정들이 반복되는지..
지난 10월 초, 추석 무렵이다.
가족은 있지만 가족 없는 현실이 절절히 처량해지는 시즌, 민족 고유의 명절(이라나 뭐라나!!!).
해외 체류 중인 남편은 25년째 그러고 있고, 결혼한 딸은 아예 미국살이.
남편을 세대주로 하는 우리 집 주민등록등본에는 여전히 세 명이 등재되어 있지만,
지난 수 십 년간, 대통령 선거도, 국회의원 선거도, 자치단체장 선거도 심지어 코로나도 혼자 치르며 보냈다.
그러니 국가가 주는 민생 보조금도 오직 나 혼자 받으며 대한민국 국민 노릇은 가족을 대표하여 나 혼자 하고 있다고나 할까.
자녀 입시를 잘 치르려면 '조부모의 재력과 아빠의 무관심'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던데,
아이 초등학교 4학년이 끝날 때부터 혼자 담당했던 육아의 성과는 조부모의 재력 없이 오직 아빠의 무관심 덕분으로 엄마가 집중하여 성공(?)할 수 있었다.
나는 혼자이어서 외로웠고 아이의 성장과 함께 치러내야 하는 많은 일들이 참으로 벅찼다.
그러나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형편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딸아이 혼사마저 혼자 감당하며 울기도 많이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시절 다 보내며 오늘에 잘 이르렀다. 감사하다. 그러나 그런 시간도 오래되니...
지친다.
딸마저 미국 사람이 되는 듯한 분위기에 이름 붙은 날들, 특히 명절이 되면 명절 증후군을 앓는 어느 착실한 며느리처럼 내 마음은 심란해진다. 명절에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이 짜증거리다.
가령, 시댁에 가지 않아도 되는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 명절의 의무는 친정에는 여전하다. 가족도 없고 찾아올 손님도 없어서 자유로움을 구가해야 할 내가, 구십이 넘으신 친정엄마와 아직도 싱글인 60대 중반의 오빠가 있는 그 집의 명절을 걱정하는 형편 말이다. 자신들의 배우자와 자식들 치다꺼리에 바쁜 언니들과 달리 친정엄마, 오빠, 나로 구성된 우리 3인은 마치 우리 집안 안에 현존하는 결손 가족의 집합체로 꾸역꾸역 명절 치르기를 같이 해내곤 한다. 나도 남편이 (아직) 있고, 게다가 열 아들 부럽지 않게 잘 키운 딸도 있지만 이런 날엔 결손가족 친정이 아니고는 혼자이어야 하는 나의 형편이 마음에 그늘을 드리운다.
명절에 안 와도 된다는 친정엄마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음식을 장만하여 친정집 현관문을 덜컹덜컹 심란한 티를 팍팍내며 요란하게 드나들고 있는 나, 그런 증상이 이번 추석엔 조금 더 심했다.
이혼도 못하고 같이 화합하지도 못하며 현실의 불편한 상황들은 애써 미뤄둔 체 산 세월이 이리도 오래 되었으니 가족은 있지만 '가족'이 없는 나의 형편에 대하여는 친구들도, 형제들도 이제는 시큰둥한 반응들이다.
이혼은 두렵다.. 는 나를 이해 못 한다.
경제적으로도 자유롭고 (나는 연금수급자이다.) 자식 키우기도 다 끝낸 이 마당에 왜 훌훌 털고 새 출발을 못하고 반복적으로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는 나를 답답해한다. 나의 한숨, 고민, 괴로워하는 감정 토로에 응응.. 하며 맞춰주기는 하지만, 결국은 제자리일 거야.. 하며 안타까워한다.
그러니까, 이혼을, 왜 못하는 건데?
전에는,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운다고.. 그런 상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자식 삶에 흠이 될까.. 상상은 해 보았어도 그래도.. 하며 생각하기를 미루었다.
온전한 가정, 온전한 부모의 모습이고 싶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그는 그저 우리 곁에 부재할 뿐 내게 불편함을 주지는 않았다.
그 바쁘고 그 벅차고 그 생각많고 할 일 많은 나날에 우리 문제는 저 멀리 미뤄둘 수 있었다.
아이 키울 때, 나 젊었을 때는.. 남편, 아이 아빠, 가장.. 이런 저런 여러 의미가 있었던 그의 부재는 큰 문제거리요, 슬픔이었다. 그래서 나의 베개 속이 나의 눈물로 얼룩덜룩 세계지도가 그려졌어도 아이가 어른이 되어 나의 할 일이 다 끝나고, 나의 젊음도 기울고 보니.. 남편이나 가장의 부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려움'인 듯 그 의미들이 점차 희미해졌다. 남편? 없어도 괜찮아, 아니 좋잖아, 자유롭고...
이런 심정이랄까.
평생의 일터를 퇴직한 직 후, 정말 많은 일들이 몰아닥쳤다.
아이를 혼인시켰고, 수 십 년간 살던 집을 뜯어고쳤다. 19년이나 타고 다니던 차를 폐차시켜야할 만큼 대형 교통사고가 있었지만 나는 끄덕없이 살아남아 혼인한 딸 내외를 새로 고친 집에서 맞으며 두어 달 새가족 살이도 해 보았다. 그러는 사이 내 어깨를 누르고 있던 인생의, 삶의 짐들이 하나 둘 내려졌다는 안도감에 이제부터는 진정한 자유인으로 행복할 줄 알았는데..
지난여름, 아이들이 한국에 왔을 때, 그가 우리 집에 왔다.
3년 전, 미국에서 아이들 결혼식 때 보고 처음이었다. 그런데 마치 1주일 전 해외 출장 나갔다가 귀가하는 모습처럼 스스럼없는 태도로 집에 온 그와 달리, 나는 아이들 눈치 보며 사위와 딸 앞에서 엄마 아빠요, 장인 장모의 온전한 (듯한) 모습을 보이는 '척하는' 며칠을 열심히 보냈다.
그런 남편에게 아무런 시비를 걸지 않았다면 그는 허허 웃으며 또 예전처럼 중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 속이 어떤지, 우리의 앞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이들 없는 틈을 타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나랑 이야기 좀 나누어요..' 하는 말로 남편과의 대화를 시도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그의 태도가 서늘하게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 그와 나누었던 같잖은 몇 마디 말 중에 '뭐든, 해달라는 데로 해 줄 테니 말해.'라는 그의 말.
그 말에 이어했던 나의 대답,
'나는... 이혼은 싫어요. 그러니 대신 ... 자유를 줘요. 이혼은 않해도만 자유를 .... '
아흐...!!!
존 스튜어트밀의 자유론 수업인가. 다시 생각해도 한심했다.
바보 같은 답변이었지만, 나는 '내가 원한다면 그는 이혼에 응해줄' 의사는 있음을 확인하는 것에 만족하였다.
그러나 그는 내가 이혼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이혼을 두려워하고 있을까.
혼자만의 자유로운 삶에도 허전한 그늘이 찾아들곤 한다.
앞으로 이렇게 90살까지 사는 건가? 혼자서, 주욱...??
그런 생각들이 우울감과 결합을 하면 자유로운 삶이고 뭐고 슬픔만이 나를 압도하곤 한다.
가끔은 내가 에너지가 좋은 상태일 때, 혹은 자존감이 조금 높아졌다고 생각되는 어떤 때는
'내가 왜 이러고 살고 있지, 정렬을 가다듬고 다시 잘해 봐야지. 할 수 있어. ' 하는 생각이 솟구치곤 한다.
2년 전 퇴직하고 백수 생활을 시작할 때는, 마치 20대의 그 어느 날처럼 앞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가슴이 두근두근 했고, 지금도 가끔 도서관 다녀올 때 그런 느낌을 받고 한다.
지난가을 추석 무렵,
'안 되겠어, 어떻게든 결단을 내려야지.'라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혼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그 후 태평양이 뒤집어지는 듯한 대혼란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런데... 나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는 마음이었다.
그러고 시작한 것이 집 앞 교회로 새벽에 가서 기도 시간을 가져보자.. 였다.
새벽 5시 10분에 울리는 알람소리를 듣으며 주섬주섬 옷을 입고,
밤 사이 끼고 잤던 치아교정기조차 입에서 빼지 않은 채 교회로 향한다.
교회는 바로 집 앞 50m 도 안 되는 거리.
비록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아니지만, 모르는 사람들 속에 묻혀 조용히 깊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곳.
거기 앉아 생각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뭐지?
어떻게 살고 싶지?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아아아..
나는 지금, 그와 헤어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