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 화재, 홍수, 태풍, 폭설 대응
4부. 재난 시 행동 매뉴얼
2화. 지진, 화재, 홍수, 태풍, 폭설 대응
재난은 종류마다 얼굴이 다르다.
지진은 바닥이 배신하는 감각이고,
화재는 공기 전체가 적으로 돌변하는 상황이며,
홍수와 태풍은 도시라는 구조물 자체를 물과 바람으로 찢어놓는다.
폭설은 조용히, 그러나 집요하게 모든 움직임을 멈춰 세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뉴스에서는 늘 한 단어로 묶인다.
“재난.”
하지만 몸으로 겪는 입장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무엇이 어떻게 위험한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가 모두 달라진다.
이 화에서는 각 재난마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에 초점을 맞춰
지진, 화재, 홍수, 태풍, 폭설 대응을 하나씩 짚어본다.
한국에서는 지진이 여전히 어색하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훈련은 형식적이고, 건물들은 “대충 버티겠지”라는 전제 위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사람의 몸은 본능적으로 “도망”을 선택한다.
문제는, 지진의 초반에는 도망이 정답이 아닐 때가 많다는 것이다.
기본 원칙은 아주 간단하다.
머리를 보호한다.
떨어질 것들로부터 몸을 숨긴다.
흔들림이 멈출 때까지 이동을 최소화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탁자, 책상, 침대 옆 바닥 같은 낙하물에서 벗어난 공간으로 들어간다.
팔로 머리를 감싸거나, 가방·쿠션 등으로 머리를 가린다.
큰 책장, 유리장, 냉장고, TV 근처는 최대한 피한다.
엘리베이터, 계단으로 뛰쳐나가는 행동은 심한 흔들림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위험하다.
핵심은,
“건물이 아직 움직이고 있을 때는 사람도 덜 움직인다”는 것이다.
첫 화에서 말한 “첫 10분” 규칙이 여기서도 그대로 통한다.
실내 파손 정도: 천장, 벽 균열, 유리 파손 여부
주변 화재·가스 냄새 여부
계단 구조와 비상구 상태
외부 구조물 붕괴 여부
실내에 머무르기로 했다면, 비상가방(GHB, 72시간 가방), 물, 조명을 가까이 두고 2차 충격(여진)에 대비해야 한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면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
유리창, 간판 아래, 오래된 담장 근처를 피해 이동
건물 벽에서 조금 떨어진 쪽(낙하물 범위 밖)으로 이동
지진은 “첫 충격이 지나가도 끝난 게 아니다”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여진과 2차 붕괴, 그리고 그 후의 혼란이 이어진다.
화재는 빠르게 번지는 불꽃보다,
먼저 사람을 죽이는 건 대부분 연기와 유독가스다.
사람들은 불을 보면 불길을 피하려고 위로, 바깥으로, 큰 길로 뛰어 나간다.
하지만 실제 화재 사망자의 상당수는
불을 직접 보기도 전에, 어둠과 연기 속에서 쓰러진다.
집, 사무실, 호텔 등에서 불이 났을 때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다.
불꽃을 구경하지 말고, 연기를 먼저 보라.
연기가 보이는 순간, 자세를 낮춘다.
가능한 한 빠르게 출구 방향으로 이동한다.
구체적인 행동은 이렇다.
코와 입을 옷소매, 수건, 마스크로 막는다.
연기가 위로 모이기 때문에,
엎드린 자세 혹은 무릎을 굽힌 반쯤 기어가는 자세로 이동한다.
문을 열기 전, 손등으로 문 손잡이를 짚어본다.
뜨거우면 문 너머에 불길이 있다는 뜻이다. 그 문은 열지 않는다.
복도 끝, 계단 쪽으로 이동하되,
엘리베이터는 절대 타지 않는다.
만약 아래층이 이미 불길에 휩싸인 상황이라면,
무작정 아래로 내려가는 대신
위층으로 피난 후, 옥상·창문에서 구조 신호를 보내는 선택지도 고려해야 한다.
(건물 구조, 화재 위치에 따라 판단)
가정 내 작은 화재(가스레인지, 쓰레기통, 전기멀티탭) 정도는
초기에 소화기가 있다면 진압이 가능할 수도 있다.
소화기를 꺼내고,
안전핀을 뽑고,
불꽃의 윗부분이 아니라 불의 근원부(바닥, 뿌리)에 분사한다.
하지만 다음의 경우라면,
진압 시도보다 탈출이 우선이다.
연기가 빠르게 방을 채우기 시작한 경우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불길이 보일 때
전기·가스 합선의 소리가 나거나, 폭발 위험이 느껴질 때
집 안 물건을 구하러 되돌아 들어가는 행동은
대부분 “후회로 끝나는 패턴”에 가깝다.
사람이 빠져나오고 나면, 그 다음은 보험과 수리의 영역이다.
홍수는 천천히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비가 오기 시작하고,
물이 점점 차오르고,
하수구가 역류하고,
지하 주차장이 습해지고,
지하철역 입구로 물이 스며든다.
사람들은 이때까지도 종종 이렇게 생각한다.
“에이, 설마 여기까지 차겠어.”
홍수에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지하 공간에 계속 머무는 것과,
차량 안에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다음 상황에서는
지하에 있거나, 지하로 내려가 있는 상태 자체가 위험하다.
지하철역 입구 쪽으로 물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한다.
지하 주차장 바닥에 물이 고이는 수준을 넘어 “흐르는 느낌”이 난다.
하수구·맨홀에서 물이 뿜어져 나온다.
지하 상가, 반지하 집의 창문 쪽으로 물이 밀려온다.
이럴 때는
최대한 빨리 지상, 그리고 가능하면 더 높은 층으로 올라가는 것이 최우선이다.
홍수의 무서운 점은
전기가 차단되고,
어둠과 물이 동시에 더해지고,
방향감각이 무너진다는 것에 있다.
특히 지하 주차장, 반지하 집, 지하 상가는
한 번 물길이 잡히면 순식간에 물이 차오른다.
도심 도로를 운전 중인데
앞쪽 도로가 이미 침수되어 있고,
차들이 거북이처럼 간신히 지나가는 상황이라면
“나도 그냥 통과해야겠다”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버려야 한다.
바퀴의 절반 이상까지 물이 차오르면,
차는 언제든 떠밀려갈 수 있다.
하천변, 지하차도, 다리 아래, 지하 터널은
‘잠길 가능성이 높은 공간’이다.
물이 이미 빠르게 들어오고 있다면
차량을 버리고 높은 곳(도로 옆 경사, 건물 안, 계단 등)으로
몸부터 피하는 게 맞는 선택일 때가 많다.
차량은 나중에 보험과 견인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차를 지키려는 본능”을 이기는 것이
홍수에서의 첫 번째 생존 조건이다.
태풍은 예고가 있는 재난이다.
며칠 전부터 경로가 발표되고,
기상청 예보가 계속 나온다.
그래서 준비할 시간이 있다는 것이 장점이자,
“별일 없겠지”라고 방심하기 쉬운 단점이기도 하다.
태풍 대응은 재난 중에서도
“사전 준비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창문, 베란다, 간이 구조물(화분, 빨래건조대, 에어컨 실외기 주변)을
단단히 고정하거나 실내로 들인다.
이동 가능한 물건(쓰레기통, 의자 등)은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정리한다.
핸드폰 보조 배터리, 랜턴, 라디오, 물, 비상식량을
집 안 눈에 잘 띄는 곳에 모아 둔다.
차량은 지하 주차장보다는
침수 위험이 적은 지상, 되도록 고지대에 주차한다.
태풍이 본격적으로 가까워졌을 때
쓸데없이 외출하지 않는 것도
중요한 ‘행동의 한 종류’다.
강풍 시에는 빌딩 사이 골목, 교각 아래에서
순간적으로 바람이 집중되는 ‘풍압 통로’가 생긴다.
다시 말해서 간판, 유리, 간이 구조물 등이 어느 방향에서 날아올지 알 수 없다.
이렇기 때문에 태풍이 수도권을 관통하는 날,
“잠깐 편의점이라도…”는
충분히 위험한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밖에 있어야 하는 직업이라면(택배, 배달, 현장직 등)
빌딩 모서리, 간판 아래, 유리창 바로 옆에 서지 않는 것,
스마트폰 보며 걷지 않고 주위를 자주 둘러보는 것 정도만으로도
위험 요소를 꽤 줄일 수 있다.
태풍은 순식간에 지나가는 번개 같은 재난이 아니라,
몇 시간~하루 이상 지속되는 “장기전형 재난”이다.
지치지 않고 조심하는 것이 관건이다.
폭설은 보기에는 가장 아름답고,
실제로 겪기에는 가장 피곤한 재난이다.
눈 자체는 조용하지만,
그 결과는 꽤 시끄럽다.
도로 마비
대중교통 두절
배송·물류·식자재 공급 지연
쓰러진 가로수, 끊어진 전선
폭설이 시작되고,
도로가 막히고, 버스가 꼼짝을 못 하고,
지하철 출구 앞에 눈더미가 쌓일 때쯤 되면
사람들은 대개 이미 너무 늦게 움직이고 있다.
폭설 초반에는
괜찮겠지,
금방 그치겠지,
오늘 할 일만 마치고 가야지
라는 생각 때문에
“돌아갈 타이밍”을 놓치기 쉽다.
현실적인 기준을 하나 잡자.
기상 특보가 이미 발령되었고,
집이나 안전한 장소까지 이동하는 데 1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라면,
“조금 일찍 돌아간다”라는 선택이
생각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폭설은 사람을 한 번에 죽이진 않는다.
대신 지치게 만들고, 갇히게 만들고, 며칠씩 묶어둔다.
도시형 생존에서 폭설은
“차 안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만드는 대표적인 재난”이다.
그럴 경우에 대비해 두면 좋은 것들:
차량용 GHB에 담요, 핫팩, 간단한 간식, 물, 보조 배터리
연료를 너무 아슬아슬하게 쓰지 않는 습관 (겨울철에는 특히)
배기구가 눈에 덮이지 않도록
수시로 확인하고 눈을 치워주는 것
차 안에서 히터를 켠 채 잠들면
배기가 막히는 상황에서 일산화탄소 중독 위험이 커진다.
그래서 눈이 허리까지 쌓이는 한파 예보에는
차량 이동 자체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 좋다.
집 안에서는
수도관 동파 방지(약하게 물을 틀어두기, 보온재 감싸기)
전기 사용량 관리, 난방 기기 과부하 방지
며칠간 장을 보지 못할 상황을 대비한 기본 비상식량 확보
폭설은 결국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가”의 싸움으로 이어진다.
지진, 화재, 홍수, 태풍, 폭설.
단어만 놓고 보면 서로 완전히 다른 재난 같지만,
그 안에서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의외로 비슷하다.
먼저, 몸을 지키고
다음, 주변을 확인하고
그다음, 머무를지 움직일지 결정하는 것
각 재난은 이 공통 구조에
자기만의 “변수”를 하나씩 얹는다.
지진은 바닥이 믿을 수 없게 되는 상황
화재는 공기 자체가 독이 되는 상황
홍수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위험해지는 상황
태풍은 시간이 길고, 예고가 있는 대신 방심을 부르는 상황
폭설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도시를 묶어버리는 상황
생존주의자의 시각이란
세상을 공포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각 얼굴의 재난이 왔을 때,
내 몸이 어떤 순서로 반응해야 할지 미리 알고 있는 상태”에 가깝다.
이 화는 개괄이다.
각 재난마다 더 깊게 들어가자면
하나하나가 책 한 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이 정도의 그림과 원칙을 머릿속에 넣어둔다면
어느 날 갑자기
바닥이 흔들리고,
연기가 밀려오고,
물이 차오르고,
바람이 창을 두드리고,
눈이 도시를 덮을 때
당신은 적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처음 겪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건, 생각보다 큰 차이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