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재난 시 행동 매뉴얼.
4부. 재난 시 행동 매뉴얼
3화. 사회 인프라 붕괴(정전, 교통 마비, 통신 두절, 금융 마비)
재난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먼저 눈에 보이는 장면을 떠올린다.
불타는 건물, 흔들리는 다리, 잠긴 도로, 뒤엉킨 차량들.
하지만 실제로 더 오래, 더 깊게 사람의 삶을 파고드는 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쪽이다.
전기가 끊기고,
버스와 지하철이 멈추고,
휴대폰에 “서비스 불가” 네 글자가 뜨고,
카드 단말기가 먹통이 되는 순간.
문명은 여전히 눈앞에 있다.
아파트도 있고 편의점도 있고 은행도 있는데,
전기·교통·통신·금융이라는 네 줄의 끈이 끊어지는 순간,
우리는 ‘문명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에 서 있게 된다.
이 화에서는 그 네 가지를 한꺼번에 묶어
“사회 인프라 붕괴”라는 이름으로,
각각이 실제로 어떻게 다가오는지, 그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뤄본다.
정전은 생각보다 자주 온다.
아파트 한 동, 동네 한 구역, 때로는 도시 일부.
이유는 다양하다. 노후 설비, 폭염으로 인한 과부하, 폭설, 태풍, 설비 사고.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잠깐 나갔다 오면 들어와 있겠지.”
가끔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가끔씩은, 그 “잠깐”이 수시간, 혹은 그 이상이 된다.
정전이 되는 순간, 인간은 몇 초간 멍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멍해진 몇 초가 꽤 크다.
우선 해야 하는 건 단순하다.
주변 사람의 상태를 확인한다.
아이, 노약자, 혼자 있던 사람,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사람은 없는지.
즉시 휴대폰 플래시를 켠다.
가능하면 바로 소형 랜턴이나 헤드랜턴으로 갈아탄다.
(휴대폰 라이트는 “긴급용”, 랜턴은 “지속용”으로 역할을 나누는 편이 좋다.)
콘센트에 꽂혀 있던 민감한 기기들(PC, 일부 가전)은
멀티탭을 내려두거나 플러그를 뽑는다.
전기 재공급 순간의 전압 변동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엘리베이터 안이라면 인터폰으로 관리실, 119에 연락을 넣고
가능하면 불필요한 몸짓을 줄이고 내구전 모드로 전환해야 한다.
(이때를 대비해, 엘리베이터 탑승 시 물·휴대폰·간단한 라이트를 항상 갖고 다니는 습관이
자리 잡혀 있으면 아주 큰 차이가 된다.)
정전이 30분, 1시간, 3시간을 넘기기 시작하면,
우리는 전기를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인프라로 보기 시작해야 한다.
우선순위는 이렇다.
빛 – 안전한 이동과 낙상·충돌 방지
물 – 펌프 작동이 멈출 수 있는 아파트, 고층 건물
통신 – 상황 파악과 외부 정보 확보
그래서 다음의 행동들을 권장한다.
- 램프와 랜턴의 위치를 집 안 사람 모두가 알 수 있게 한다.
(“엄마만 아는 서랍 속”이 아니라, 식탁 한가운데 같은 곳)
- 수도 상태 확인
고층 아파트라면 펌프가 멈추면 곧 물도 멈출 수 있다.
물이 나오는 동안에는 욕조, 대야, 빈 생수통 등에
생활용수(씻기, 세탁, 화장실용)용 물을 확보한다.
휴대폰은 무분별한 사용을 줄이고, 문자·카카오·뉴스 위주로,
화면 밝기와 사용 빈도를 줄인 “아껴 쓰기 모드”로 전환한다.
냉동·냉장고는 문을 불필요하게 열지 않는다.
몇 시간까지는 얼음 상태가 유지될 수 있으니
괜히 확인하려고 자꾸 열어보는 습관이 가장 손해다.
정전은 보통 “멀리서 시작된 사고”가 아니라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도시의 구조”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따라서 ‘곧 들어오겠지’라는 막연한 낙관 대신,
‘최악을 가정하고 최소한 준비를 한다’ 쪽이 이득일 때가 많다.
교통 마비는 단독으로도 오지만,
대부분 다른 재난과 함께 온다.
폭설로 고속도로와 국도가 마비되거나
폭우로 지하차도와 하천변 도로가 잠기거나
사고·시위·붕괴로 주요 도로가 폐쇄되거나
그러면 도시는 순식간에 섬이 된다.
차량은 섬 안에서 갇힌 작은 철제 상자가 되고,
사람은 도로 위에 고립된 보행자가 된다.
교통 마비 상황에서 가장 큰 오판은
“어떻게든 더 가보자”이다.
이미 차들이 꼼짝 못하고 서 있는 구간에
또 다른 차열을 만드는 것은
생존 관점에서 그다지 의미 있는 선택이 아니다.
지하철역, 터미널, 정류장에 사람이 넘쳐날 때는
그 사람들의 스트레스, 짜증, 집단심리도 같이 쌓여 있다는 뜻이다.
이럴 때 고려해야 할 건 한 가지다.
“이동을 포기하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이득일 수도 있다.”
현실적인 선택들:
집이 너무 멀다면,
중간 기착지(친구 집, 회사, 24시간 영업 편의 시설, 숙소)를
아예 도착 목표로 삼는 것.
차량 중심 사고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인지”를 다시 계산해보는 것.
도로 위 하룻밤을 전제로
차량용 GHB + 담요 + 식량을 꺼내어
체력 낭비를 줄이고 생존 모드로 전환하는 것.
차량·대중교통이 모두 마비되어
결국 걸어서 이동해야 할 때가 온다.
이때 필요한 건 단순한 체력보다,
‘루트 선택’과 ‘체력 배분’이다.
다리, 하천, 언덕길, 어두운 공원, 인적 드문 골목은
상황에 따라 위험도가 급상승할 수 있다.
지하 통로(지하상가, 지하도, 반지하 골목)는
침수·붕괴·폭력 사태·범죄 리스크 모두가 겹칠 수 있는 환경이다.
가능하다면
인구 밀도는 어느 정도 있지만
밀집·혼잡까지는 아닌 길
병원, 관공서, 학교, 대형마트 등
“필요시 피난 가능한 거점”을
중간중간 하나씩 지나가는 루트로 움직이는 편이 좋다.
교통 마비는
“어디도 가지 못하는 감각”을 통해
사람을 심리적으로 압박한다.
그러나 역으로 말하면,
‘어디까지는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을 빨리 내리는 사람이
체력과 시간을 가장 덜 낭비한다.
통신 두절은 현대인의 멘탈을 가장 빨리 무너뜨리는 재난이다.
와이파이 끊김, 데이터 끊김, 통화 불가, 메시지 지연.
휴대폰에 “긴급 통화만 가능” 혹은 “서비스 불가”가 뜨는 순간,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생각을 거의 동시에 한다.
가족은 괜찮을까
뉴스는 어떻게 확인하지
이거 진짜 큰일 아니야?
그 자체가 바로 불안의 작동 방식이다.
당장 ‘정보’가 아니라 ‘안전’을 먼저 확인한다.
지금 있는 공간이 안전한지,
불·물·붕괴 위험은 없는지부터 보는 것이 우선이다.
주변 사람들과 정보 공유 네트워크를 만든다.
혼자서 애타게 휴대폰만 보는 것보다,
근처 사람들과 “지금까지 들은 얘기, 알고 있는 사실”을 모으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다.
TV, 라디오, 차량 라디오, 휴대용 라디오 등
‘비(非)통신망’ 정보 채널을 찾는다.
(차량형 GHB나 집 안에 라디오 하나쯤은 두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통신이 끊기면,
사람들은 쉽게 소문, 추측, 공포에 휘둘린다.
“카더라”가 진실을 대체하기 시작하는 시점이 바로 이때다.
그래서 생존주의자의 시각에서는
“정보 공백 구간에서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고,
어떤 기준으로 움직일지를 정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통신 두절은 “그 순간의 행동”만으로는
대부분 근본 대처가 어렵다.
평소 준비가 사실상 전부에 가깝다.
가족·연인·지인과
“통신이 완전히 끊겼을 때 만날 장소”를 미리 정해두는 것.
예: 집 근처 ○○초등학교 운동장, ○○동 주민센터 앞, ○○공원 입구 등.
주요 전화번호를 머리로 외우거나,
종이에 적어 지갑·가방 안에 넣어두는 것.
(요즘은 폰이 없으면 가족 번호조차 기억 못 하는 경우가 많다.)
오프라인 지도를 집·차량·가방에 1장씩 넣어두는 것.
통신이 끊기면 네비, 카카오맵, 구글맵도 무용지물이다.
통신 두절은
“문명이 끊긴다”라기보다
“문명과 나를 이어주는 실이 스르르 풀린다”에 가깝다.
그때 당신을 붙들어 줄 건
통신망이 아니라,
미리 세워둔 약속과 습관이다.
현대 도시에서 금융 마비란,
카드·계좌 이체·ATM·온라인 뱅킹이 동시에 꼬이는 상황을 의미한다.
전산 장애
대규모 해킹, 랜섬웨어
통신사 장애 (통신 두절과 동반)
금융기관 자체 장애
편의점, 마트, 주유소, 약국에서
카드·페이·계좌이체가 전부 멈추고
“현금만 가능”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때 비로소 사람들은 깨닫는다.
“아, 내 통장 잔고가 지금 당장은 아무 소용이 없구나.”
금융 인프라가 부분적으로 마비되면,
실제 현장에서 체감되는 변화는 꽤 단순하다.
물건을 사고 싶은데 결제가 안 된다.
ATM이 먹통이라 돈을 뽑을 수 없다.
계좌 간 이체가 안 되어 송금이 불가능하다.
온라인 결제, 배달앱, 교통카드 충전도 막힌다.
이때 생존 관점에서 갈리는 지점은 하나다.
“당장 쓸 수 있는 현금과,
소액 결제를 대신할 수 있는 수단이 있는가?”
이미 앞선 경제 파트에서 다뤘듯,
생존주의자로서 최소한 다음 정도의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한다.
- 지갑 혹은 가방에 현금 소액 다수
(5천원·1만원권 위주로 5만~10만 원 정도)
자택 내 별도 보관용 현금 (생활비 1~2주분)
달러 현찰 소액(비상시 교환·거래용)
- 카드사·은행 시스템과 분리된 현금성 자산
(CMA, MMF, 여러 은행·증권사 분산 등)
금융 마비 상황에서 해야 할 행동은 크게 세 가지뿐이다.
1) 당장 필요한 생존비용을 우선 확보한다.
식량, 물, 교통, 약, 유류 등.
2) 불필요한 지출, 특히 온라인 기반 소비를 전면 중단한다.
(이 시기에는 사실상 작동도 안 될 가능성이 크다.)
3) 복구 이후를 염두에 두고
장기적 자산 상태를 차분히 확인한다.
(성급한 매도·이체·대출은 오히려 더 큰 손실을 부를 수 있다.)
금융 마비는
“돈이 사라진다”라기보다
“돈이 잠시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리는 것”에 가깝다.
이 잠시 동안 버틸 수 있는 자산이 있는가,
그게 경제적 생존주의의 관점이다.
현실의 재난은
정전, 교통 마비, 통신 두절, 금융 마비가
순서대로 하나씩 찾아오지 않는다.
지진이 난다. → 정전. → 통신 두절. → 지하철 중단. → ATM·카드 먹통.
태풍이 온다. → 전신주 파손. → 정전, 통신 불안. → 교통 마비. → 유류·물류 차질.
이렇게 섞여서 온다.
이 상황에서 살아남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극적인 용기나 영웅적인 행동보다도,
오히려 이런 부분에서 갈린다.
본인이 어제까지 준비해 둔
작고 단단한 시스템이 있는지
“지금은 움직일 타이밍이 아니다”라고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는지
정보 공백 상태에서
스스로 기준을 세우고 움직일 수 있는지
사회 인프라가 붕괴된다는 건
곧 “도시라는 게임의 룰이 잠시 멈춘다”는 뜻이다.
그때 당신은,
아예 새로운 게임을 배우는 대신,
기본적인 것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내 몸의 안전
내 주변의 사람들
오늘과 내일 먹고 마실 것
최소한의 빛과 온기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위에,
조금 더 올라가면 통신과 금융,
조금 더 올라가면 자산과 장기 계획이 있다.
사회 인프라 붕괴라는 말은 거창하다.
하지만 실제로 몸으로 겪는 건 대체로 이런 모습이다.
불이 안 들어온다.
버스가 안 온다.
전화가 안 터진다.
카드가 안 긁힌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의 표정에는 비슷한 글자가 떠오른다.
“설마 진짜 이 정도까지 갈 줄은 몰랐다.”
생존주의자는
세상이 망할 것만 상상하며
불안에 떠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문명이 멈출 수 있음을 한 번쯤 진지하게 상상해 보고,
그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를
미리 해놓은 사람이다.
정전은 손전등과 물 준비로.
교통 마비는 GHB와 “되돌아갈 용기”로.
통신 두절은 오프라인 정보와 사전 약속으로.
금융 마비는 현금과 분산 자산으로.
이 네 가지를 한 번이라도
자신의 생활 동선에 맞춰 점검해본 사람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 사이의 차이는
비상시에 숫자로는 표현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차이가 생사를 가르는 순간들이
세상에는 실제로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