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자랑스런 방어기제
드라마 정주행, 반차, 글쓰기 그리고 생존의 순환고리
사실은,
계속 업무에 힘을 쏟다 보면 내가 사랑하는 내 모습들이 사멸할까 두려웠다. 지금의 업무가 나의 핵심과 협응하지 않기에 더더욱 그랬다.(물론 이미 사라진 부분들도 있다. 소멸까지는 아니라고 하고싶다.)
그럼에도 요즘은 그런 두려움을 조금씩 극복할만한 돌파구를 찾은 것 같아 다행이다. 왜냐하면 사회인이라는 새 종족의 세계에 진입한 후 근 이년을 되돌아보면 나는 내가 사랑하는 나의 면모들을 지키기 위해 매일을 고군분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방어기제는 생각보다 잘 작동했다.
나는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에게 항상 주고 싶은건, 그 깊이와 양상이 다를지는 몰라도 일종의 사랑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부터가 사랑을 풍족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랑이 아주 넘쳐나는 사람. 넘쳐나는 잉여마저도 사랑인 사람. 하지만 사방에서 다가오는 요구사항들과 문제, 그것을 해결하고 또 해결하는 일상에 파묻혀 살다보면 사랑은 어느샌가 바닥을 보인다.
정리하고 보고하는 일상에 지쳐 가끔씩은 내 옆의 누군가가 생명체처럼 보이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아니, 나 스스로조차도 그저 일하는 기계같다. 그건 반가움과 착함을 연기하는, 진심이랄것이 한참 전에 죽어버린 기계다.
그러므로 머릿 속에 남는 건 문제 해결에 적합한 사고 구조일 뿐이다. 사랑을 내뿜기 위한 에너지는 그런 사고구조를 유지하는 데에 모두 소진된다.
그런데 그럴 때면 나는 항상 혼자만의 시공간에 나를 가두곤 하더라. 크게 계획하지 않은 반차를 쓰고 늦잠을 자다가 온다던가.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반차를 썼기 때문이다.) 아니면 현실과 거리가 있는 다른 세계관에 머리를 냅다 담근다. 이때는 특히나 온 마음과 감정들을 푹 담가야 한다. 새벽이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예컨대, 요즘에는 닥터후를 다시 정주행했다. (타디스는 꼭 한 번 타보고 싶다.) 글을 쓰기도 한다. 별 것 없는 흰 바탕에 활자들을 풀어내다 보면 다시 나로 회귀한다. 별것 아닌 노력들의 집합체는 곧 나의 정체성으로 수렴한다. 내가 간직하고, 수호하고만 싶은 나의 아이덴티티가 소생한다.
기분 좋은 리셋이다. 업무에만 쩌든 내 스스로를 바라보는 비참한 감정도 조금은 망각된다. 다시 차오른 에너지로 나는 사랑을 주려는 사람으로 수리된다. 수리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소진될 때면 나는 꼭 예측할 수 없는 어느 곳이 고장난다.
요즘의 나는 그런 소소한 노력들이 사실은 처절한 고군분투였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가는 중이다. 이토록 절실히 내 몸과 마음을 보호하는 방어기제. 나의 자랑스러운 방어기제. 알고 보면 그 모든건 무척 적극적인 투쟁이었음을 이제는 안다. 그때 새벽을 지새워서 드라마를 보지 않았더라면. 그때 반차를 쓰고 늦잠을 자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때, 내가 아무런 글자도 끄적이지를 않았더라면. 나는 매일을 읊었을 것이다. 오늘도 어떻게 살아 남았네. 내일도 죽지 말자. 사랑이 바닥을 보일 때마다 그 말을 반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