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끄루쓰 Jun 03. 2022

'그런 것'

노답 상황을 긍정하고픈 이들을 위하여


나름 어엿한 사회인이 되고자 서둘러 졸업을 결정했다.


대학생 신분으로 누리던 일상생활에서의 제한된 자유마저 반납하고 사무직 회사원으로서의 (어찌 보면 지루하고 어찌 보면 다이나믹한) 삶을 선택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일방적으로 주입된 것인지, 내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는 차치하고 안정성이 상당히 중요하며, 따라서 공공기관 사무직으로 진로를 설정한 것은 나의 합리적인 판단이 충분히 작용한 결과라고 여겼다. 그래서 내 선택이 자의인지 타의 인지도 모른 채, 그러나 당연히 자의일 것이라 굳게 믿으면서, 그저 후회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곤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진로문제는 단순히 ‘나 뭐해먹고 사냐’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이냐’의 문제이더라. 자아탐구에 열을 올렸던 과거의 오랜 시간들이 무색하게도 이 문제에서는 말 그대로 ‘답이 안 나왔다.’ 나는 아직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적확하고 명징한 몇 가지 단어로 나를 정의하기 어렵다. 아니, 고작 몇 가지 단어로 어떤 한 사람을 완벽히 표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인지’를 몇 자 적어놓은 종이들을 가지고 어떻게 적절한 진로를 결정해? 그래서 나는 이렇게 답 안 나오는 질문에는 ‘다 그런 거지’라는 대답을 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냥 ‘그런 것’이 되고 싶다고.   


많은 이들이 나의 대답을 단순한 회피로 치부해버리겠지만, 또 혹자는 나를 그저 철없는 사회초년생의 전형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내 나름의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고민의 시간 동안 나는 '그런 것'에 대한 나의 상념들을 차곡차곡 머릿속 한켠에다 쌓아놓고, 그렇게 쌓인 작은 개념들의 집합체를 한 부분씩 해부해나갔다. '그런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런 것'의 새로운 정의는 무엇인가. '그런 것'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런 것’은 참으로 유용한 사회적 용어임이 분명하다. 내가 해답을 내지 못할 때마다 항상 적당한 변명이자 정답 비스무리한 것의 역할을 해주는 고마운 친구이기 때문이다. ‘뭐 있잖아 왜, 그런 거지.’라는 대답에 사람들은 ‘그런 것’의 의미를 파악했는지의 여부를 떠나 쉽게 수긍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는 ‘이런 것’ 또는 ‘저런 것’과 같은 대명사 모양의 유사품 말고 꼭 ‘그런 것’이어야 한다. 지칭하는 대상이 너무 정확한 이거 말고, 너무 먼 저것도 말고, 적절한 거리에서 간신히 존재감만 인지될 수 있는 그것이어야 한다.


사실 ‘그런 것’은 답이면서도 답이 아닌, 답과 오답을 양 끝으로 하는 스펙트럼의 어느 중간께에 위치하는 것인데 (그 위치는 가변적이다) 실제 대화 상황에서는 모든 질문의 답으로 호환되는 만능열쇠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것’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의 기반에는 '의미의 교집합'이 있다.

‘그런 거지 뭐’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그런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제 나름대로 해석하고 저마다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그렇게 정해진 '의미'라는 일종의 연속적 개념은 사람 간에 서로 교집합을 지닐 가능성이 높은 그 교집합의 크기는 경우에 따라 다를 것이다. 물론 그 크기를 정량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사실상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 당연히 사회에 접어든 순간부터 인간은 개별성과 보편성의 혼합 속에서 자신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교집합의 존재는 분명하면서도 모호할 것이다.


시작쯤에 언급했던 내 경우를 예로 들자면, 만약 누군가 '이제 졸업도 했는데, 넌 뭐가 되고 싶니'라고 물었을 때 내가, ‘사무직으로 생각은 하고 있어. 근데 뭐, 다 그런 거지’라고 대답했다고 치자.

내 대답의 의미를 혹자는 ‘그렇지, 안정성이 중요하지’라고 받아들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이는 ‘그래 다 나이 들면서 편한 길을 찾는 거지’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두 가지의 생각이 있다고 봤을 때 '안정성'과 '편함'사이의 공통적 뉘앙스, 즉 의미상의 교집합을 지닌다는 것이다. 너와 나는 같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동시에 다른 성향 또는 경험을 지닌 사람이므로 두 사람이 부여한 의미가 a=b, 또는 a=/b와 같이 극단적인 양상을 띨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래서 ‘그런 것’이 대화 속에서 통하는 과정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다른 너와 내가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될 수 도 있다.




그래서 내가 밝혀 낸 '그런 것'의 정체는 청자 간의 '의미의 교집합'으로 작동하는, 노답 상황에서의 만능열쇠이다. 그렇지만 꽤 많은 경우, 특히 1:1의 대화 상황에서 혹자는 자신의 의미 부여를 잠시 보류한 채로 상대방의 ‘그런 것’을 탐구하려는 우를 범한다. ‘그런 게 뭔데?’와 같은 의문문의 시작으로 그들은 나도 아직 결정하지 못한 나의 '그런 것'을 파헤친다. 이처럼 ‘그런 것’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그 마법 같은 단어의 절대적인 호환성은 힘을 잃는다. 결국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답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대화는 한없이 심각해지거나 또는 (대화를 포기하는 경우) 피상적으로 변질된다.


 그래서 나는 ‘그런 것’ 이상의 것을 묻지 않는 이들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아마 그 의미를 홀로 곱씹거나 ‘그런 것’에 대한 생각을 몽땅 지워버린 채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비로소 ‘그런 것’은 무한한 의미를 독식하는 단어로 재탄생한다. 세상에 답을 낼 수 없는 질문들이 얼마나 많은데 (예를 들어, ‘너 뭐가 되고 싶니’ 같은) 이런 치트키 하나 정도 있는 게 이 복잡다단한 세상 살기에 편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그런 거지 뭐', ‘그런 거 있잖아’, ‘그런 거겠지’와 같은, ‘그런 것’의 눈부시게 다채로운 응용버전들의 의미를 굳이 파헤쳐서 내 치트키의 호환성에 상처를 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부탁해요. 진심으로.


자, 이렇게 되면 내 노답 상황의 진로 고민은 열린 결말로 끝을 맺게 된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내 미래를 긍정하게 되고.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그냥 나는 ‘그런 것’이 되고 싶고, 여기서 ‘그런 것’은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바로 ‘그런 것’과 달라도 상관없고 같아도 큰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그 천금 같은 무관심에, 소리 없는 그 배려에 오래도록 감사를 표할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회사원 김z의 하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