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만에 그 일본가옥을 헐고 벽돌집을 짓고 그저 평생 집 걱정 없이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 여기며 살아내기에 바빴던 부모님이셨습니다.
집 사고 50년이 지났지만 대지 60평 건평 35평인 이 흔하디 흔한 시골 주택은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었습니다.
굳이 하나 찾아내자면 원래 이 집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순사 대장이었던 일본 경찰청장 관사로 지어졌다는 것이었는데.
광복이 되면서 그 집 식구들이 하루 만에 급히 이 집을 버리고 일본으로 도망갔고.
그 후 도의 자산으로 편입되었다가 일반인에게 매도되면서 우리에게까지 넘어왔다는 건
분명히 입증된 사실이었습니다.
일본 관광객 십여 명이 우리 집 담장 너머로 고개를 빼들고 집 구경 아니 마당 구경하던 그때였습니다.
40년 전 집 건너편 지금은 없어진 당시 국민학교에 일본인 관광객들이 찾아온 적이 있는데
일제 강점기 시절 이 학교에 다녔던 일본인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그 당시 일본인 경찰청장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 이 집 마당 깊숙이 지금 돈으로 100억이 넘는 금궤를 묻고 떠났다가 찾으러 오지 않았다란 이야기를 한잔 술과 함께 불콰하게 버스에서 이야기했고.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학교 구경은 뒤로한 채 우르르 우리 집으로 몰려와서 마당을 구경하고 간 것이 이 소문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아버지의 헛기침소리는 현금 백억 부잣집 대감님의 거드름 소리처럼 들렸고
부엌의 어머니 상차림 달그락 소리는 더 이상 힘든 부엌살림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게 마지막 수고일 거라고 소리치는 행복에 겨운 외침으로 전해왔습니다.
모두가 잠든 어둑한 새벽녘.
인부 몇 명이 삽과 곡괭이를 들고 집으로 찾아왔고 차라리 대낮에 하면 이상 하지나 않았을 그 괴이한 작업을 마치고 돌아간 아침. 그 누구 하나 전날 들었던 헛기침과 부엌의 달그락 소리 내지 못한 채 공연히 파헤친 마당 바라보며 한숨만 쉬고 있었습니다.
어린 나의 눈에는 그저 이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상황이 궁금하기만 했으나 그 누구에게도 물을 수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