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티스에서 오티움으로: 그래니(할머니)의 새로운 도전

by Story Piper

딸아이가 나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책벌레 엄마가 왠일이래. 요즈음 책을 안 읽네."

"피곤해..."

황혼 육아라는 명목 하에 지친 일상에서 그게 내가 말하는 '휴식'의 전부였다. 스마트폰을 무의식적으로 스크롤하던 시간은 내 시간이 흘러간다는 사실만을 남기고 정작 내게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문요한 작가의 『오티움』이 날아왔다. 정확히는 SOS 신호를 보내던 내가 붙잡은 구명보트였다.


깨달음의 순간

"살아갈 힘을 주는 나만의 능동적인 휴식, 내 삶의 의미를 만들어주는 여가, 내적 성장의 기쁨을 주는 능동적인 여가활동."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마치 누군가가 내 머리를 딱! 하고 때린 기분이었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내려온 '오티움(otium)'이라는 개념. 단순한 게으름이나 휴식이 아닌, 자기 성장을 위한 능동적 여가를 뜻하는 이 말이 내 현실을 정확히 진단해주었다. 독서든, 드라마 시청이든,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었는지가 중요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오티움의 5가지 기준을 읽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나는 지금까지 오티움이 아니라 오티스를 타고 있었구나. 그 오티스, 엘리베이터 말이다. 위아래로만 왔다 갔다 하면서 정작 어디로도 가지 못하는, 그런 일상 말이다."


그런 깨달음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기회가 있었다. 지역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그림책 도슨트 프로그램 소식을 알게 된 것이다. 경기도서관 개관 기념 BIB 수상 작품 전시 해설을 위한 도슨트 양성 프로그램이었다.

"이거다!"

황혼 육아라는 사막에서 찾은 진짜 오아시스였다. 오랫동안 아이들과 영어그림책 수업을 해온 내게 이보다 완벽한 오티움의 시작점이 있을까? 망설임 없이 신청 버튼을 눌렀다.


깊이 있는 배움의 과정

총 10회 교육 과정은 예상보다 깊이 있었다. 그림책의 역사부터 생태인문학, 도슨트 기술까지. 작가의 의도, 색채의 의미, 구도의 효과를 하나하나 알아갈 때마다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가장 힘들면서도 의미 있었던 건 나만의 스크립트 작성이었다. 단순한 정보 나열이 아닌, 내 언어로 관람객에게 전달할 이야기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나만의 강점을 발견했다. 영어그림책 수업 경험이 다른 시각을 제공했고, 아이들 눈높이에서 그림책을 읽어본 시간들이 모두 자산이 되었다. 내 연륜이 만든 독특한 스토리텔링이 완성되어가는 과정 자체가 성취였다.


완벽하지 않은 첫 시작

그리고 드디어 어제, 첫 도슨트 활동을 했다. 열심히 준비한 대사들이 긴장으로 사라졌다. 마치 컴퓨터 블루스크린 같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불쾌하지 않았다. 관람객들과 만나는 순간, 그동안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준비한 대본은 잊었지만, 아이들과 나눈 수많은 그림책 이야기들이 새로운 옷을 입고 등장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마치 요리할 때와 같았다. 레시피는 잊었지만 손이 기억하는 감각. 완벽한 스크립트보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가 더 진짜였다.


진정한 오티움을 찾다

바로 그 순간 깨달았다. 이것이 진정한 오티움이구나!

즐거운 긴장감, 성장하는 확신, 의미 있는 나눔의 보람. 소파에서 스마트폰 보는 '수동적 휴식'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생각해보니 내 도슨트 경험은 오티움의 5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하고 있었다.

자기 목적성 - 누가 시킨 것도 아닌 내가 원해서 시작한 일

일상성 - 특별한 날이 아닌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는 활동

주도성 -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시간

깊이 - 단순한 재미를 넘어 진짜 배움과 성장

긍정적 연쇄효과 - 더 많은 그림책을 읽고 싶고, 다음 도슨트가 기대되는 마음


딸아이가 다시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엄마는 이제 진짜 쉬는 법을 배웠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쉼은 나를 더 바쁘게 만들어. 좋은 의미에서 말이야."


새로운 여행의 시작

황혼 육아의 무게감 속에서 찾은 나만의 오티움. 완벽하지 않은 첫 도슨트였지만, 이제는 확신한다. 진정한 휴식은 소파에 누워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성장시키고 타인과 의미 있게 연결되는 시간이라는 것을. 앞으로 더 많은 관람객들과 만나고, 더 깊이 있는 해설을 준비하고, 언젠가는 나만의 그림책 이야기도 써보고 싶다. 오티스에서 내린 나는 이제 진짜 여행을 시작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이 자신만의 '오티움'을 찾는 용기를 내보셨으면 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변화는 이미 시작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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