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 라페

by 비상 시 출구

음식을 만들 때 조리법을 참고한다


조리법에 재료가 적혀있고


우린 재료들을 준비해


알맞은 크기로 자르고


알맞은 양의 양념과 익힘으로


요리를 완성한다


허나


만일 당근이 당근이 아니라면


그러니깐 당근처럼 보이는 주황색 물체가 요리책 재료에 적힌 당근이 아니면 어떡할 것이냐는 문제가 발생한다


당근처럼 보이지만 전혀 당근의 성질을 가지지 않은 물체에 속아 나는 버젓이 당근 라페를 만들고 있던 것이다


결과물 당연 당근 라페일 수가 없다


실상은 당근(처럼 보이는 주황색 물질을 당근 대신 주재료로 사용한) 라페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오류는 시작된다


느끼함 잡으려 젓가락으로 집어든 몇 가닥의 당근 라페는 재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애써 레시피대로 만든 당근 라페가 오히려 식욕을 떨어뜨리니 딴 생각을 무진장 한다


혀가 잘못되었나, 기분이 별론지, 상했다던지


여기서부터 오류는 범람하기 시작한다


사고의 사고를 거치며 사건의 순수성에 먼지가 켜켜이 쌓여들고


오류로 점철된 원문을 고장난 번역기로 돌리기까지 한다


그러니 확실함, 100% 원물은 매우 중요하고 그 가치가 크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확실한 원물로 만들어졌다면 몇 시간이고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


반면 아무리 리치하더라도 과정과 원물이 불투명하다면 그 자체를 불투명한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확실함이란 절대적 가치나 기준에 의한 객관적 성질도 존재하지만


결국 인생이란 자신이 가치를 정의하고 과정을 밟아나가는 현대의 사고방식을 받아들일 때


자신만의 확실한 원물들을 확보해둘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 원물들은 어떠한 상황이곤 훌륭한 재료가 되어 예측불가능한 상황에 예측가능한 변화를 가져온다


피라미드적 사고방식은 잘못되었다


중간적 중간은 있지만 /중간/ 즉 사이는 없다


당근 라페와 당근 라페 비슷한 것의 격차는 너무나도 커다래서


당근 라페에 실패했을 땐 과감히 주황색 덩어리를 싱크대에 쏟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차라리 제주에 내려가 올레길을 걷다가 햇볕을 쬐는 당근 몇 개를 서리했더라면


자연에서 원물을 취득하는 것은 사라지지 않을 주요한 가치다


이젠 곳곳에 불투명함이 가득하다


곳곳에 안개가 피어오르고 시력이 나빠진 것도 아니지만 대상마저 흔들리보인다


당근 라페를 집는다 입에 넣는다 씹어본다


당근 라페를 먹으려 했던가


나는 배가 고팠나


당근을 어디서 처음 접했는지


먹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입은 왜 벌리는 구조일까


라페는 앞으로 어떤 여정을 겪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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