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으로부터의 안전이별

나를 멈춰 서게 하는 브레이크 찾기

by 호기쉼

네 번째 조각, 브레이크 패드가 닳아버린 이유



처음엔 브레이크가 엑셀을 안전하게 잡아주는 안전장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브레이크도 엑셀이랑 비슷한 성격일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멈출 수밖에 없는 것. 자연스럽게 두 가지가 떠올랐다.



알레르기 브레이크



종합병원이라고 불릴 만큼 내 20대는 질병과의 긴 싸움이었다. 과장 없이 365일 중 300일쯤 약을 먹었다. 자잘한 질병의 종류는 꽤 다양했다. 얼마나 병원을 많이 다녔는지,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전화해서 어느 병원이 좋은지 묻곤 했다. 엑셀을 그렇게 밟아댔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몸이 빨리 축나는 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성실하게 엑셀만 밟아대던 어느 날, 온몸에 구석구석 정체 모를 알레르기가 돋았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녀석은 당황스럽게도 전신으로 퍼져 염증이 되었고, 나는 가렵고 화끈거리는 환부에 더 이상 약이 들지 않아 두 달간 백야를 보냈다.



한 시간 반에 한 번, 아이스팩이 녹을 때마다 새것으로 갈아야 했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유능하다는 의사를 찾아가도 소용없었다. 대학병원에서 받아온 스테로이드를 먹고 바르며 버텼다.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때쯤, 계절이 바뀌었고 날씨가 추워지면서 알레르기와도 서서히 이별할 수 있었다.



가렵지 않은 일상에 감사함을 느끼면서, 동시에 꽤 많은 것들을 멈춰버릴 두려움을 얻었다. 이전에는 직진만 했다면 이제는 피부 면역력을 위해 일부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포기해야 했다.



나에게 '덜어내는' 법을 알려준 브레이크였다.



'좋은 사람' 브레이크



또 다른 브레이크는 '좋은 사람'이다.



나는 기준점이 높아 스스로에게 매우 박한 편이다.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내가 보기에도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이따금씩 누군가의 부정적인 말에 뿌리째 휘둘리곤 했다. 그게 너무 싫어서,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었다. 그렇게 점차 내가 원하는 것들을 포기하는 순간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되었다.



좋은 사람. 나는 좋은 사람이어야 했다. 그것은 나의 욕구를 억압하는 강력한 브레이크가 되었고, 매 순간 의사결정을 하는 데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평생을 옭아맸던 두 번째 브레이크였다.






마치 전혀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그때까지 적은 것들을 찬찬히 다시 읽어보았다. 익숙한 누군가를 바라보듯 글 속의 누군가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제야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엑셀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아대며, 아무도 시킨 적 없는 불행을 자처했다는 것. 상담사가 왜 나에게 '힘든 삶'을 살았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나를 직면하는 건 생각보다 훨씬 괴로운 일이었다. 힘들다고 자각하지 못했던 이전과 달리, 지금은 감각들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었다. 오히려 감정 불구였던 때가 그리울 만큼 아팠다. 이제는 조금 편안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저 창문을 열고 시원하게 내려가자.



잠깐이면 끝날, 그 시간이 지나면 자유로워질 거야. 나는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이 숨이 되어 나에게 다가왔다. 눈을 감고, 깊이 들이마셨다. 천천히 나를 감싸는 것을 느낄 때쯤, 내 안에 예민한 무언가가 쏟아져 나왔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굵은 울부짖음이었다.



상담사가 말한 '엑셀'과 '브레이크'는 바로 이런 것들이었을까?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한 장면처럼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쏟아내고 나서,

나는 '좋은 사람'을 보내주기로 다짐했다.

이미 나는 좋은 사람이기에.






엑셀과 브레이크에서 발 떼기



그날 이후, 나는 엑셀도 브레이크도 밟지 않기로 했다. 두 손 두 발을 다 들어보자.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아무것도 하지 말아 보자. 죽지도 말고, 살지도 말자.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엑셀도 브레이크도 없는 '진짜' 나를 만나게 되겠지.



그렇게 나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 다음 스텝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의 내가 궁금해졌다.



나를 향해 내딛는 다섯 번째 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