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가속하는 액셀 찾기
처음 만났을 때, 상담사는 내가 '엑셀'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으며 살았다고 했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그 둘의 정체였다. 나는 어떤 액셀을 밟으면서 살아왔던 걸까. 액셀과 움직임, 나라는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 나로 하여금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그 정체 모를 무언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조마조마한 불안
얼마 지나지 않아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나를 움직인 동력, 그것은 불안이었다.
지금은 좋은 친구를 얻었지만, 그때처럼 하루아침에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그래서 매일 자기 검열을 하는 것처럼 내가 잘못한 점은 없는지, 나 때문에 친구가 속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곤 했다.
가장 불안했던 건 인간관계였다. 불의의 사고와도 같았던 그 일이 나에게 심각한 정신적 외상을 남겼던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게 화근이었다. 정작 나는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여겼고, 그 정도 힘들지 않은 인생은 없다고(지금도 그렇다고 생각)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주 작은 일도 때로는 나비효과를 일으키는 법이다. 나는 무엇을 잘못해서 일어난 일인지 원인을 몰랐기에, 무엇 하나도 잘못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에게 강박적으로 완벽한 수준을 요구했다.
불안은 나를 움직이게 했다. 완벽함을 원하는 사람은 남보다 두 배로 노력해야 한다. 나는 작은 실수라도 할까 봐 중요한 일을 앞두면 두려움에 휩싸이곤 했다. 어떤 일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완벽하게 통제한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불안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완벽'에 집착
불안해하면서까지 유독 완벽한 결과에 집착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나는 그 실마리를 가족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평범하지만, 조금 특이한 면이 있다. 끊임없이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 가족 구성원 모두 대학원을 다녔고, 부모님은 환갑이 훌쩍 넘은 지금도 새로운 자격증에 도전하고 있다. 휴일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N잡'을 위해 일한다. 누군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100퍼센트 자발적인 일이다.
'노력'은 우리 가족이 추구하는 키워드였지만, 노력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차이가 있었다. 바로 노력의 과정과 결과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나] 노력 > 결과
[부모님] 결과 > 노력
나는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며, 실패하더라도 이를 보완해서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 부모님은 과정보다는 결과가 중요하며, 결과가 좋으면 비로소 과정이 가치 있어진다고 믿었다.
어느 쪽이든 틀리지 않았음을 안다. 하지만 나는 결과에 상관없이 '과정'을 인정받고 싶었다. 내 뜻대로 잘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위로가 받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보기에 노력이 충분했다면 격려를 받았고, 충분하지 않았다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처럼 느껴졌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했다면 부모님도 위로를 건넸을 텐데, 내가 이기려고 덤벼드니까 부모님도 단호하게 대응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더 날카롭게 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밖에서는 지나치게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고, 집에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던 같다.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이기적인 시기였다.
가족만큼은 내 모습이 어떠해도 나를 수용해 주길 바랐다. 내 노력이 부족하더라도, 내 실력이 부족하더라도 평가하지 않고 공감해주었으면 했다. 내가 믿을만한 사람은 가족밖엔 없었다. 그런데 가족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껴서 슬펐고, 화가 났다.
나는 스스로를 인정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최선을 다 했다. 나라도 나 자신을 인정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녹초가 될 만큼, 온종일 무언가를 위해 노력해야만 '열심히 살았다'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래야 내 선택이 틀리더라도 용서할 수 있었다. 완벽함은 나의 또 다른 액셀이었다.
어쩌면 나 혼자만의 허상이었을지도 모르는 그 부담감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나는 이상하리만큼 쓸쓸하고 덧없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찾고 있던 세 번째 조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