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처음의 꿈
한서연은 조심스레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지막이 울리고, 오래된 나무 바닥은 그녀의 발소리를 부드럽게 흡수했다. 낡은 나무 의자가 놓인 테이블 중앙에는 세월의 흔적이 깃든 노트와 고풍스러운 붓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테이블 위로 쏟아지는 햇살은 작은 창으로 들어와 따스하게 공간을 감싸고 있었다. 벽에는 옛날 풍경화들이 걸려 있었고, 나무 기둥에서는 은은한 나무 향이 퍼져 나왔다.
“여기에 당신의 이야기를 적어 보세요.” 가게 주인이 조용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단호했고, 어디선가 신뢰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어깨에 걸친 두꺼운 스카프를 가볍게 만지작거리며 서연을 바라보았다.
“이야기요?” 서연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낯선 상황에 그녀의 눈에는 망설임과 호기심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의 노트를 바라보았다. 표지에 새겨진 미세한 균열이 그동안의 세월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당신이 잊어버린 꿈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야 합니다. 그것을 가장 먼저 적어 보세요. 어떤 모습이든, 어떤 감정이든, 떠오르는 대로요.”
서연은 잠시 침묵했다. 붓을 쥔 손이 살짝 떨렸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려왔던 손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꿈에 대해 이렇게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테이블 위의 햇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붓과 노트를 번갈아 바라보던 서연은 마침내 천천히 노트를 펼쳤다. 종이가 스칠 때 나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녀의 마음속 불안을 자극하는 듯했다.
‘내가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그 설렘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그녀는 첫 문장을 적었다. 어린 시절, 하얀 도화지 위에 선을 그어가던 순간의 흥분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손끝에서 색이 퍼지며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내던 기쁨도 떠올랐다. 그 순간의 기억은 생생했지만, 곧 이어 희미해지기 시작한 감정들이 함께 떠올랐다. 서연은 노트를 넘기며 손끝으로 페이지의 거친 질감을 느꼈다.
처음으로 그림이 무겁게 느껴졌던 날을 떠올렸다. 그녀는 필연적으로 떠오른 기억에 숨을 들이쉬었다. 그림에 열중하던 어느 날, 완성작을 두고 누군가의 차가운 한마디가 그녀의 마음을 무너뜨렸던 순간. “이게 뭐야? 너무 평범하잖아.” 그 후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즐거움보다 불안과 비교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 비판이 정당했는지조차 생각할 겨를 없이, 그녀의 자신감은 서서히 사라졌다. 그림을 마주하는 시간이 점점 고통스러워졌다.
“그때부터였어요. 제 그림이 점점 제 것이 아니게 된 것 같아요.” 서연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녀의 말에는 쓸쓸함이 묻어 있었다. 테이블 위로 비치는 햇살이 더 따스하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가게 주인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다정함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침묵을 지켰다.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장면 하나를 그려 보세요.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지금 당신이 가장 선명하게 떠올리는 이미지를요.”
서연은 붓을 들고 잠시 멈칫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붓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캔버스 위에 펼쳐지는 이미지는 흐릿한 하늘 아래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였다. 가지는 온전치 못했고, 바람에 흔들리며 고개를 숙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무 주변은 텅 빈 여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잎사귀 몇 개는 바람에 떨어지려는 듯 위태로워 보였다.
“이건… 그냥 떠올랐어요.” 서연은 그림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말투는 자신감이 없었지만, 어디선가 해방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녀는 그림 속 나무를 바라보며 자신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나무인지 모르겠지만, 이게 제 마음 같아요. 혼자 있고, 불안정하고, 뭔가 부족한…”
가게 주인은 그림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은 침묵 끝에 천천히 이어졌다. “좋습니다. 이 나무는 당신의 현재를 나타냅니다. 당신이 느끼는 외로움, 불안정함, 그리고 부족함. 하지만 이 나무는 여전히 살아 있죠. 가지가 어디로 뻗어나갈지는 이제 당신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제가 결정할 수 있다고요?” 서연은 놀란 듯 물었다. 그의 말은 믿기 어렵다는 듯 반문했다. 그녀의 눈에는 의심과 약간의 희망이 섞여 있었다.
“그렇습니다. 이 나무가 어떤 모습을 갖게 될지, 어떤 풍경 속에 있을지는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당신의 꿈은 스스로 그려 나가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돕는 것이 바로 내 역할이기도 합니다.”
서연은 그 말을 곱씹으며 다시 캔버스를 바라보았다. 나무의 주변은 아직 하얀 여백으로 남아 있었다. 여백을 바라보는 동안 그녀의 가슴 속에 무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그림을 그리며 느꼈던 설렘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어와 가게 안 공기마저 가볍게 흔드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그 여백을 채우기 위해 다시 붓을 들었다. 아직 정확히 어떤 그림이 완성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괜찮다고 느꼈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다시 붓을 잡았다는 사실이었다. 서연은 조용히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진짜 내 그림을 그려볼래요.”
가게 안의 공기가 한층 따뜻해진 듯했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살짝 불며 작은 나뭇잎들을 흔들고 있었다. 그녀의 그림은 이제 막 시작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