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성장의 길
서연은 오늘도 익숙한 골목길을 걸으며 가게로 향했다. 하지만 오늘은 발걸음이 평소보다 무거웠다. 지난 며칠 동안 캔버스에 그린 자신의 세상이 정말로 옳은 방향인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매일 가게에서 작은 단서들을 받아들이며 자신만의 씨앗을 키우고 있다고 믿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답답함과 막연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특유의 나무 향이 서연을 맞이했다. 그러나 오늘은 주인도, 익숙한 메모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에는 낡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를 열자 안에는 여러 개의 작은 병과 낡은 책 한 권이 담겨 있었다. 병 속에는 각각 다른 씨앗이 담겨 있었고, 병마다 라벨이 붙어 있었다.
"희망," "용기," "인내," 그리고 "사랑."
책의 첫 페이지에는 주인의 필체로 보이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씨앗은 이름에 따라 자라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심고 싶은 씨앗은 무엇인가요?"
서연은 씨앗 병을 하나씩 살펴보며 고민에 잠겼다. 각각의 씨앗이 상징하는 의미를 생각하니,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지금의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용기일까? 아니면 인내일까?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사랑"이라는 라벨이 붙은 병을 손에 들었다.
그 순간, 가게 문이 열리며 낯선 여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서연보다 나이가 조금 많아 보였고, 손에는 커다란 화분을 들고 있었다. 여자는 주인을 찾는 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서연에게 다가와 말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주인님 계신가요?"
서연은 고개를 저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여자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수민이라고 해요. 이곳을 자주 찾던 손님이었죠. 그런데 요즘은 뜸했네요."
수민은 자신의 화분을 내려놓으며 설명했다. 화분 속에는 이미 자라난 식물이 있었지만, 가지는 휘어져 있었고 잎은 시들어 있었다.
"씨앗을 심었을 때는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열심히 물을 주고 돌봤는데도, 결국 잎이 시들기 시작했어요. 주인님께 다시 방법을 물어보려고 왔는데..."
서연은 화분 속 식물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씨앗을 심고 가꾼다는 생각만 했지, 씨앗이 자란 뒤의 모습까지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혹시, 화분의 위치를 자주 옮기셨나요?" 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민은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맞아요. 햇빛이 부족한 것 같아서 여기저기 옮겼어요. 그런데... 그것 때문이었을까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씨앗은 자신에게 맞는 환경에서 자라야 해요. 자주 환경이 바뀌면 뿌리가 제대로 내릴 수 없을지도 몰라요."
수민은 잠시 멍하니 서연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너무 잘하려다 보니 오히려 망쳤을지도 모르겠어요."
서연은 수민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녀 자신도 더 나은 그림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방향을 바꾸는 자신을 떠올렸다. 씨앗을 심는 것만이 아니라, 씨앗이 자라도록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저 씨앗을 함께 심어보시겠어요?" 서연은 손에 들고 있던 "사랑" 라벨이 붙은 병을 보여주며 말했다.
수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가게 뒷마당으로 나가 작은 화분에 씨앗을 심었다. 씨앗을 심고 나니 서연의 마음속에서 조금씩 자신감을 되찾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수민과의 대화 속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씨앗이 자라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히 물과 햇빛뿐만이 아니었다.
"흔들리지 않는 뿌리."
서연은 씨앗을 심으며 자신도 그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주변의 시선과 순간적인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성장하고 싶었다. 그녀는 씨앗이 자라나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렇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