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직업일기
"언니, 원래 승무원은 관종끼가 있어야지 할 수 있대요. 근데 이 말 진짜 맞는 거 같아."
"응? 그런가? 왜?"
"우리 유니폼을 입고 나가는 순간부터 사람들 시선 집중되잖아. 그럴 때 좀 즐겨야 해. 안 그러면 부담스러워서 진짜 어디 숨고 싶더라. 특히 공항 게이트 딱 도착해서 문 열릴 때. 그때 다른 일행 기다리는 사람들이 승무원들 보면 시선을 못 떼."
"아, 그렇네ㅎㅎㅎ 맞아. 그걸 즐길 줄 알아야 하긴 해."
예전에 언젠가 우리 집에 놀러 온 동기 막내가 해준 말이다. 승무원은 관종끼가 있어야 하고, 또 그걸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말. 처음에는 그런가? 싶었는데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말 맞는 말이다. 승무원이란 자고로 관종끼가 있어서 승객들의 시선을 가끔은 느끼고 즐길 줄 알아야 하고, 심지어는 연기력도 필요하다.
유니폼을 입고 공항 사무실로 출근하는 그 순간부터, 평범함으로 무장한 나 자신이 아닌 월드 클래스 '승무원'인 나로 변신한다. 브리핑룸에 출근 도장을 찍고 크루들과 인사를 나누고 함께 공항 게이트로 향하는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 모든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공항에 바글바글한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에게 순간 집중된다. 우리를 보고 큰 목소리로 "와우, 너희 어디 가니?"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고, 어쩜 그렇게 다들 늘씬하면서도 예쁘냐면서 칭찬을 해주는 사람들, 수줍은 웃음을 지으면서 손 인사를 건네주는 꼬마숙녀와 꼬마신사들까지. 출근하는 길이 다른 직업들보다는 평범하지는 않다.
출근길에 받는 수많은 시선들과 더불어서 비행기에 올라 이륙을 시작으로 착륙할 때까지. 아니, 착륙 후 호텔까지 가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우리를 향해 수 백개의 시선들이 꽂힌다. 어떤 비행에서는 승객들이 대놓고 카메라로 우리의 모습을 찍거나 동영상을 찍기도 한다. (이럴 경우, 승무원이 불편하다면 죄송한데 사진 촬영은 조금만 양해해 달라고 할 수 있다.) 좁은 기내 복도에서 카트를 끌고 일을 하는 내내, 승객들은 우리를 쳐다본다. 이 승무원은 어떻게 응대하는지, 친절한 지 등등 매의 눈으로 관찰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서비스가 다 끝나고 중간중간 아픈 승객들이 없는지, 무엇이 더 필요하신 승객들은 없는지, 혹여나 메디컬 이슈가 필요하신 분들은 없는지 확인 차 복도를 왔다 갔다 할 때면, 잠을 청하지 않는 승객들의 시선은 다 우리에게 향한다. 승객들과 바이바이하고 우리도 해외 공항에 내려서 이동을 하는 도중에도 시선들은 다 우리를 향한다. 공항 출구 문이 쫙하고 열리면서 캐리어를 끌고 종종거리면서 다 함께 이동하는 그 모습이 어쩌면 장관 아닌 장관인지라, 정말 모든 사람들은 다 우리를 쳐다본다. 그러고는 수군거린다. 어, 저기 어디 항공사잖아. 그러고 느껴지는 시선들. 이럴 때 필요한 건 뭐다? 바로 이 순간을 즐기면서 뿌듯해하는 내 마음속 저 깊속 한 곳에 숨겨져 있던 연예인의 끼, 관종 끼다.
내게 있어서 가장 시선이 많이 느껴지는 순간은, 모든 승객들이 다 착석한 뒤에 이륙 준비를 위해 복도를 왔다 갔다 할 경우이다. 이럴 때 정말 몇 백개의 눈들이 다 나를 향하는 것을 느끼는 데 정말 가끔은 너무 부담스러울 때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관종끼를 발현해서, 이 순간을 즐겨야만 한다. 오히려 더 "이 시선!! 다들 나를 바라보는 이 시선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하는 즐기는 마음으로 한껏 가짜 입가 미소를 흠뻑 지으면서 지나다녀야 한다. 그렇다. 승무원들에게는 관종끼가 필요하다.
관종끼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연기력도 필요하다. 이건 다른 업무를 하면서도 필요하지만, 나는 특히나 서비스업에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한 메서드 연기력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주겠다.
한 번은 호주로 가는 비행이었다. 한 인도인 중년 여성이 아주 깐깐했다.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뭐가 맘에 안 든다 등등. 아주 그라운드에서부터 맘에 안 드는 거 천지였던 그녀는 성격도 까탈스러웠는데 얼굴 표정 역시 무표정으로 나 포함 모든 크루들을 응대했다. 그녀에게 본인이 먹겠다던 식사를 가져다줬는데 냄새가 난다며 다른 음식 없냐고 하길래 다른 것이 남아서 가져다줬다. 추후에 그 음식 맛은 괜찮냐고 물어보니 맛이 너무 짜다며 또 다른 음식을 갖다 달란다. 그렇게 나를 똥개훈련을 시킨 그녀... 그렇게 마지막으로 남은 음식을 설명하고 가져다주고서는 어떻냐니 이제야 맘에 든단다. 결국 대부분의 메인 메뉴를 맛본 그녀였다. (어쩌면... 고도로 숨겨진 그녀의 전략이었을까? 그렇다면 리스펙 한다.)
그렇게 서비스가 끝나고 나서 기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승객들의 테이블을 정리했다. 승객들이 주무시는 경우와 쉬는 경우, 음료를 다 안 마시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는 조용히 치운다. 깐깐한 인도 여자 승객 테이블에 놓인, 물이 별로 안 남은 컵을 보고 나는 '더 이상 안 드시겠구나, 정리해야지' 하고 조용히 컵을 들어서 치우려고 했다. 그러자 옆에서 따갑게 느껴지는 그녀의 시선... 정말 눈을 흘겨보다는 표현이 적절하게 그녀는 내 모든 것을 위에서부터 훑어보면서 표정을 잔뜩 찡그렸다. 순간의 살기(?)를 느낀 나는 본능적으로 '이대로 들고 갔다가는 앞으로 내 미래가 힘들어지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연기력을 펼쳐 보였다. 바로 컵을 들자마자 '아! 안에 물이 들어있었구나!' 하는 순진무구한 몰랐던 표정과 동시에 놀란 안면근육의 표정을 지으면서 살포시 다시 물컵을 내려놓은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는 듯이 말이다... 그러자 그녀의 시선은 다시 기내 모니터 영화를 향했다. 그녀와 멀어지며 속으로 생각했다. '휴.. 살았다. 고맙다. 내 연기력.'
기내에 무언가가 없을 때에도 그렇다. 이미 없는 걸 알지만, 단호하게 없는데요?라고 말하면 승객 입장에서는 '뭐야.. 찾아보겠다는 노력이나 시늉도 안 하고 바로 없다고 하니까 기분이 나쁘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경우. 그럴 때도 승무원들은 연기력이 필요하다. 찾는 시늉. 찾는 연기력. 여기저기 다니면서 없냐고 이미 없다는 걸 알지만 물어보면서 찾으려고 노력하는 연기말이다. 물론 이런 연기력도 노력이 필요하다. 승객 입장에서는 본인이 찾는 것이 없다는 것에 대한 결괏값은 똑같겠지만, 그래도 그 결과가 오기 이전에 보이는 과정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니 이런 열연의 연기력을 펼치는 게 오히려 더 낫다. 승무원을 위해서도 그렇고 승객을 위해서도 말이다.
승무원이 되기 전에는 단순히 승무원은 기내에서 소방관이 되기도 하고, 간호사가 되기도 하고, 청소부가 되기도 하고, 안전요원이 되기도 하고, 웨이트리스가 된다는 사실만을 알고 인지했었다. 근데 여기에 더해 실제로 현직 승무원으로 일하다 보니 관종력과 연기력도 필요하다는 것을 몸소 체감하게 된다. 어쩌면 이 관종력과 연기력이 현직으로 일하는 데 더 필요한 자질인 것 같기도 하다.
참.. 승무원은 정말 팔색조 직업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 나는 현직 개미 승무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