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세이문예> 2024 겨울 게재
딸아이와 오랜만에 강원도로 여행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 휴게소 주유소 직원의 말이다.
평소 셀프 주유나 키오스크 사용이 서툴러 사람이 해주는 곳을 찾았던 터라, 고속도로 휴게소 주유소 입구에 큼지막하게 척 붙어 있는 ‘SELP’ ‘셀프’ 표지를 보니 좀 긴장되었다.
자신 없어하는 나 대신 딸아이가 용감하게 노즐을 잡았는데, 그 순간 “큰일 나요, 큰일!” 소리치며 저쪽에서 누군가가 뛰어왔다. 깜짝 놀라 무슨 일인가 했더니, 노즐을 그렇게 잡으면 기름이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다.
얼굴을 가리개로 온통 가려 눈 주변만 빼꼼 보이는 퉁퉁한 중년 남자다. 민망해서 뻘쭘하게 서 있는 나와 달리, 딸애는 그렇게 위험하면 주의사항으로 써 붙여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야무지게 말한다. 직원은 그에 대해선 아무 대답 없고 “아니, 처음 주유해 봐요?” 한다. 그렇다고 했더니, “아, 모르면 나를 불러야죠. 이젠 기계랑 사는 세상인데, 이런 건 이제 상식이에요. 상식.”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졸지에 상식 없는 인간 취급을 당하며 주유를 마쳤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직은 사람이 주유해 주는 곳이 있지만 곧 없어질 것이고 모든 것을 기계로 처리하는 세상이 될 텐데, 나이 든 사람은 점점 살기 힘들어지겠다, 두런두런 앞날을 걱정하다 보니, 노인이 되었다는 실감이 확 다가왔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이제 넌 노인이야.” 스탬프를 쾅쾅 찍어준 거 같달까.
이젠 기계랑 사는 세상이라며 셀프 주유는 상식이라고 훈수 둔 말이 다시 떠오르며 뒤늦게 짜증이 올라왔다. 아무 데나 상식이란 말을 쓰네, 심사가 뒤틀렸다.
그의 말을 곱씹다 보니, ‘상식’이란 말을 애용하던 이가 생각났다.
정작 본인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서 “상식이 없다”는 표현을 즐겨하던 이. 내가 보기엔 별로 이상하지 않은, 그러나 쓸데없이 엄숙한 걸 좋아하는 이들의 눈엔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싶은 부분들에 대해 영락없이 ‘상식’을 들이밀던 사람.
“아니 무슨 저런 옷을 입었을까, 몰상식하게...” 라든지 “저런 말을 하다니, 상식 밖이네.” 등등, 다른 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유난히 관심 많았던 그 사람은 상식과 몰상식을 구분하는 자신의 기준에 대해서는 한 치의 의심 없이 다른 사람들을 평가했다.
‘상식’이란 말이 그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면 원래 의미가 퇴색되고 자아도취와 편견의 냄새가 풍기는 고약한 말이 되어버렸다. 난 대놓고 그의 말에 반박하진 못했지만, 내심으로는 그가 상식 밖이라고 평가한 사람이나 행동에 대해 응원을 보내곤 했다.
나혜영 교수의 작품
난 원래부터 ‘상식’이란 말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일반적인 사람이 다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어야 할 지식이나 판단력을 의미하는 말이니, “대체로 다 갖고 있다” “일반적”이라는 점이 진부해 보여서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다. 상식과 상관없는 독보적 세계를 찬란하게 펼쳤던 카프카나 보들레르, 이상 같은 작가를 떠올리면, 상식은 낡고 빛이 바랜 경전처럼 느껴졌다.
그랬는데 “상식적이다, 아니다” 재단하던 그이의 말을 듣다 보니, 그 기준이 자의적이고 모호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사실 ‘상식’이란 불변의 견고한 성채가 아닌데, 시대나 사회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데, 확고한 진리의 잣대처럼 휘두르는 건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어딘가 불편하거나 아픈 사람, 주류가 되지 못하는 피부색과 계층, 성, 직업, 연령 등을 지닌 자들...
“일반적”이란 기준에서 배제된 이들을 떠올려 본다.
다수결의 원칙을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기지만, 그 다수에 속하지 않는 이들의 입장도 있다는 것을, 그 입장은 쉽게 묵살되어 왔다는 사실을 이제야 실감한다.
“이건 상식이야.”
우리가 별생각 없이 쉽게 하는 이 말은 모두 아는 사실을 너는 모르냐는 추궁과 비난이 스며들어 있는 말이다. 그리고 이 사실을 모르는 너는 아는 자들의 그룹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배제의 문장이다.
좋은 의미로 생각되는 말이라도 기준이 모호할 수 있고 누군가에게 아픔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라도 돌아보게 되었으니, 주유소 직원에게 감사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