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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좋은 수필

종도 안 쳤는데 내게 온 빛

장은경의 <달의 뒷면>을 읽고

by 한혜경

종도 안 쳤는데 빛은 와

잠자는 사람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 라이너 쿤체 <흩어진 달력종이 - 한여름> 중



시간이 흐른 뒤 문득 깨달아지는 일들이 있다.


종도 안 쳤는데 빛이 와 잠자고 있던 나의 눈꺼풀을 들어올렸구나.

그 빛을 가슴에 품고 살았구나.


장은경의 <달의 뒷면>은 바로 그런 발견에 대한 글이다.

아픔으로 들끓던 젊은 날 스쳐 지나갔던 사건을 오래된 사진첩에서 꺼내와 들여다본다.

아주 오래전 단양행 완행열차 안에서 일어난 일. 글은 이 에피소드에서 출발해 달에 대한 설명을 거쳐,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오는 수미상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같은 상황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변화를 통해 성숙해진 세계관을 읽을 수 있다.


사건은 옆인지 앞인지 앉아 있던 남자가 뭔가를 쓰더니, 내리면서 그 종이를 건넨 일이다.

거기에는 단정한 필체로 소동파의 <적벽회고>의 일부가 적혀 있었다.


“ (중략) 인생은 꿈과 같은 것/ 한 잔 술을 강물 속의 달에게 부어주네


얼핏 로맨틱한 영화 장면을 연상시키지만, 당시 작가는 엄마에 대한 미움과 풋사랑의 신열로 아픈 중이었으므로, “나의 한숨이 그에게 전해졌을까”가 궁금할 뿐이다.

따라서 이 일화는 이 궁금함과 시에 표현된 달에 대한 생각, 두 이야기가 뻗어나가는 시원이 된다.


먼저 달을 축으로 한 서술에서는 시에서처럼 달에게 술을 주는 상상을 하며 ‘든든한 친구’처럼 여기기도 하고 달빛에 기도하며 ‘달의 신령스러운 힘’을 믿었음을 고백한다.

이어서 과학에 의해 밝혀진 달의 속성을 열거한다. 다소 길게 여겨지는 이 부분의 요점은 달이 지구 쪽으로 앞면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동안 우리는 달의 앞면만을 응시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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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에 자신의 삶을 오버랩시킨다. 그리하여 자신의 삶이 ‘앞면에 그려진 무늬’만을 보이려는 욕심에 뒷모습을 외면하고 살아왔다는 것, 그 뒷모습엔 ‘받은 상처보다 훨씬 증폭되어 봉인된 기억’이 무늬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기에 이른다.


그 끝에 떠오르는 오래전 장면.

아마도 작가에겐 자신의 아픔과 상처만 보였을 젊은 날, 다른 사람의 한숨과 눈물을 본 남자를 생각한다.

“누구도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뒷모습을 본 사람, 그는 누구인가?


이제 변화된 작가는 젊은 날의 물음에 답할 수 있다.

“나의 한숨이 그에게 전해졌을까. 소리 없이 울고 있던 나를 본 것일까.”

비록 확신의 문장은 아니지만 “나의 뒷모습을 보았을 것이다.”란 답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그는 “소동파가 따라준 술잔을 받아마신” 자이므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면의 슬픔을 투시하고 상상할 수 있는 자이므로.


과학에 의해 밝혀진 사실이 ‘달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서정’의 자리를 밀어내듯, 작가도 오래전 ‘꿈길을 비추던 달빛’에서 빠져나와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는다.

하지만 가끔은 달빛의 ‘몽환적인 밝음’에 기대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어두운 시간’도 많지만, 종도 안 쳤는데 다가온 빛에 눈을 뜨기도 하는 게 우리 삶이니.


** 데일리한국 2025. 2.10 게재 (수필 원문 포함)

https://daily.hankooki.com/news/articleView.html?idxno=1178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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