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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좋은 수필

흔들리다

by 한혜경

기억의 사진첩 갈피를 들춰본다.


친구들과 함께 조심스럽게 동아리 방에 들어가는 신입생이 보인다.

당시 필독서인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토론하는 날이다. 조금 읽어봤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던 터라, 토론에는 참여하지 못하고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다. 꽤 열띤 토론이 끝나고 뒤풀이 시간. 아마도 신입생을 놀리려는 말이었을 텐데, 한 선배가 무슨 이야기 끝에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며 장난기 섞어 말했다.

당시 자주 통용되던 말이었다. 하지만 역사를 토론하는 수준의 대학생이 그런 말을 하다니... 우리들은 팩 하며 항변했다. 갈대가 흔들리긴 해도 꺾이진 않는다는 둥, 남자도 그에 못지않다는 둥, 씩씩댔다.

지금이라면, 흔들리는 게 뭐 어때서? 천연덕스럽게 대꾸할 텐데...


우리의 그런 반응은 흔들린다는 것은 나쁘다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의지를 지닌 위인들의 이야기를 읽고 들으며 자랐으니까. 고려말 정몽주를 회유하려 했던 이방원의 하여가에 비해 정몽주의 단심가는 얼마나 기품 있고 멋졌는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태도는 지양해야 하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죽음 앞에서도 절개를 꺾지 않는 꼿꼿함은 우러러 마땅한 것이었다.


또 다른 사진첩에서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하던 친구가 보인다.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흔들리지 않게 우리 단결해.

물가에 심어진 나무같이 흔들리지 않게


단순한 멜로디에 반복되는 가사로 시위 현장에서 자주 불렸던 노래이다. 친구는 이 노래를 좋아해 보통 때도 흥얼거리곤 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단결하면 물리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표현한 가사. 사실은 흩어질까 봐 두려웠으므로, “흔들리지 않게”를 반복적으로 불러 그 두려움을 희석시켰던 것일 게다. 대열을 만들어 학교 정문을 향해 걸어 나가다가도 전경이 저벅저벅 다가오면 꺄악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 도망가곤 했으니, 노래 가사는 현실이 아니라 희망사항이었다.

그래서 더 그 노래를 좋아했던 것 같다. “흔들리지 않게”를 주문처럼 외우면 혹시 그렇게 될까 싶어서. 하지만 나나 내 친구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또 다른 장면엔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무서워진 내가 보인다.

젊은 날의 신념이 퇴색되고 변질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또 그릇된 신념으로 수많은 이를 상처 입게 하는 경우들을 보면서. 역사상 참혹한 학살이 일어났던 곳에는 여지없이 굳건한 신념이 있었다. 민족 또는 국가를 위한 신념, 내 생각이 옳기 때문에 밀고 나가야 한다는 신념, 나와 다른 생각은 배척해야 한다는 신념...


사실 조금만 비스듬히 바라보면 그 신념의 구석진 곳에 뚫려 있는 구멍이 보일 텐데, 옆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아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아예 보려고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자신의 신념에 위배되는 대상은 모두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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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문학의 대가로 불린 요시무라 아키라의 소설 『파선』은 그러한 믿음의 결과를 섬뜩하게 보여준다.

험준한 산세와 절벽으로 갇힌 바닷가 작은 마을, “작은 집 열일곱 채가 바다에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좁은 해안선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척박한 마을이다. 아무리 거름을 줘도 비옥해지지 않는 땅에서 이들의 삶은 타지로 10년 노예로 일하러 갈 정도로 궁핍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찌 살아가나. 답은 조상 대대로 다져온 ‘믿음’에 기반한 삶이다.

이 믿음은 마을의 풍습과 질서로 나타나는데, 풍어제라든가 게으름을 죄악시하는 태도, 갓난아기는 선대의 영혼이 새 생명을 받아 돌아온 것이란 믿음 등이 그것이다,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을 죽이는 행위도 그 연장선 위에 있다. 겨울밤 내내 소금을 구우며 그 불빛으로 좌초된 배를 마을로 유인해 약탈하는 일이 이 마을의 중요한 행사이다. 난파된 배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죽이고 배의 물건을 약탈해 오는 것은 마을을 위해서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2-3년 치 양식을 확보했으니, 이 마을로서는 ‘최고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이 ‘좌초’가 순조롭게 이뤄지기 위해 마을 사람들은 초가을마다 엄숙한 의식을 치른다.

“우리 선조들은 이들을 때려죽이기로 결정하셨고, 마을은 지금까지도 선조들의 결정을 따르고 있어.”라는 말은 선조의 결정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니 사람을 죽여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발상이다.


저 멀리, 흔들리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중얼거리는 내가 보인다.


흔들림이 불러오는 아름다운 장면을 떠올리고 있다. 살짝 바람이 불어서, 혹은 아주 작은 소금쟁이 같은 것이 지나가며 미세한 물결이 이는 수면을 떠올린다. 하늘 향해 죽죽 뻗은 나무의 잎들이 살랑살랑 흔들릴 때도 떠올린다. 책을 읽다가 어떤 문장 앞에서 놀람과 감동으로 흔들리는 순간도 보인다.


그 흔들림의 파문이 내 가슴속으로 번져와 퍼져나간다. 딱딱했던 마음이 슬며시 풀어진다.



***<에세이 문예> 2025 봄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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