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진의 수필 <미여지뱅듸>를 읽고
‘참척(慘慽)’의 슬픔. 자식을 앞세웠을 때 참담함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으랴.
더욱이 남편을 잃고 힘들어할 때 삶의 의미를 알려주고 남달리 배려심이 깊던 아들인데, 겨우 스물아홉의 젊은이인데...
이명진의 <미여지뱅듸>는 소중한 아들을 갑작스럽게 잃고 무너져 내린 어미를 지켜본 글이다.
작가는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들이 어떻게 그녀를 위로하고 힘을 북돋아 주었는지, 얼마나 훤칠하고 싹싹했는지, 잘 알고 있는 자로서, 그녀의 비통함을 고스란히 느낀다. 아니, 그녀의 비통함 속에 함께 있다. 그래서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으며, 그저 곁에 서 있다.
생전의 아들이 제주에서 가장 행복했기에 제주에 와서 천도재를 지내는 그녀 곁에서 작가는 묵묵히 지켜본다. 함박눈이 내리는 속에서, 눈발을 맞으며 “안간힘” 쓰는 모습, “휘청휘청” 경내로 빨려 들어가는 작고 초라한 모습을 보며, “아들이 머물고 있는 공간은 따뜻하긴 할까.” “죽은 자와 같은 울림 없는 저음으로 중얼”거리는 소리, 스님의 이야기에 “큰 소리로 통곡하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천도재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그녀의 슬픔을 함께한다.
그 사이사이에 “미여지뱅듸”의 의미를 설명하며 삶과 죽음을 숙고한다.
“미여지뱅듸”란 “너른 벌판”이란 제주어로서 “이승과 저승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을 뜻한다. 망자가 저승으로 가기 전 떠도는 허허로운 벌판이다.
저승은 “인간에게 가장 큰 미지의 영역”이므로, 나약한 인간으로서는 믿음에 기댈 수밖에 없다. 천도재를 통해 영혼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것은 죽음이 끝이 아니기를 바라는 간절함에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다른 존재에 대한 무한한 연대와 공감의 정서를 “다정함”이라고 표현하며, 각 인물의 개별적 관점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동시에 전체를 포괄하며 광범위한 시야를 가진 서술자를 ‘총체적인 이야기꾼’이라 했다.
이명진은 천도재 내내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는 한편으로,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에 대한 사유를 펼치고 있으므로, “다정한 서술자”이면서 “총체적인 이야기꾼”의 역할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정함으로 그녀의 통한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함께 아파하는 태도는 타인이 보낼 수 있는 “최대의 응원”이면서, 슬픔에 대한 예의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천도재의 끝, 대웅전을 향해 걸어 들어온 “환한 빛”은 그녀의 아들이 “갈 곳”을 찾았기를 소망하는 마음뿐 아니라 그녀의 남은 삶에 환한 빛이 깃들기를 기원하는 작가의 마음이 투영된 장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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