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정 <별안간>을 읽고
“길을 잃어 절망에 빠지려 할 때,/ 그대의 다정한 음성이 나를 다시 부른다.”
에밀리 브론테는 <상상력에게>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삶이 힘겹더라도 상상력이 함께하니, 상상력은 “인간 근심의 확실한 위무자”라고 읊었다.
이 시처럼 최윤정의 <별안간>은 한 외로운 아이에게 상상의 세계가 얼마나 환하고 따뜻했는지, 아름답고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더 찢어질 것도 없는 궁색한 살림”,
부모는 일하러 나가고 아이는 하루 종일 단칸방에서 혼자 지낸다.
하지만 책을 좋아해 책만 있으면 혼자여도 괜찮았다.
어느 날, 동화책을 읽다가 “별안간”이란 단어를 마주한다. 사전은 없고 물어볼 어른도 없었던 아이는 혼자 곰곰 생각한 끝에 “별의 안간”이라고 해석한다.
단어의 명확한 의미는 원활한 소통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단어의 바른 뜻을 묻는 시험에서라면, 아이의 해석은 오답이다.
그러나 상상의 세계에서는 오답과 정답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이 “밝고 푹신한 말”에서 “환하고 따뜻”한 세계를 상상하고 행복해하면 되는 것이다.
빛의 안쪽으로 눈부신 마당이 있고 포근한 바람이 간간이 부는 곳, 아기별 꽃이 만개한 나무가 있는 곳, 우물에서는 따뜻한 물이 길어지고 바람에 아기별 꽃이 날리는 곳, 그리고 엄마가 새벽에 연탄을 갈지 않아도 되는 곳.
이 풍경은 아마도 현실과 반대이리라.
특히 따뜻한 우물물, 새벽에 연탄을 갈지 않아도 될 온화한 겨울을 상상하고 있으므로, 엄마가 힘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더 나아가 아이는 자신의 안에 “별의 안간”을 들이고 많은 것을 담는다.
그리고 외할머니 집에서 지낼 때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으로 쉬 잠들지 못”하던 아이를 품어주던 할머니, 삶을 일구느라 고단한 부모의 “온기가 있고 익숙한 냄새”가 곁에 있었다. 엄마가 없는 낮에는 세상의 안간들이 “요람”이 되어 돌봤기에, 아이는 “괜찮았다.”
훗날 “별안간”의 사전적 의미를 알게 되지만, 작가에게는 여전히 “별의 안간”이다.
“의지와 상관없이 순식간에 따뜻한 곳으로 건너”가게 하는.
이로써 이 글은 객관적 사실을 기준으로 명확하게 나누고 재단하는 세계와 달리, 모든 것을 품는 세상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이 세계에서는 고된 현실을 잊을 수 있으며 때로 가슴속에서 “뭉클한 것”이 비집고 나오기도 한다고 알려준다.
아울러, 간간이 “별의 안간”을 상상할 수 있다면, 상상을 벗 삼을 수 있다면, 삶이란 바다를 건너기가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그 세계로 이끄는 등대 불빛과도 같다고 하겠다.
**<데일리한국> 2025. 5.5. 게재 (수필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