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호의 수필 <보일러 속이기>를 읽고
김태길 수필의 특성을 요약한 허세욱의 문장이다.
수필가가 깊이 새겨야 할 금과옥조로 간직해 온 말인데, 손봉호의 <보일러 속이기>를 읽으며 불쑥 떠올랐다. 미문과 허세, 현학적 과시 없이 삶의 철학을 명쾌하게 펼쳐내고 있기 때문이다. 쿡쿡거리며 웃다가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작가의 철학에 경도되었음을 깨닫는다.
기상천외한 제목으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며 시작하는 글은 보일러와 아내를 속이게 된 사연과 그에 대한 도덕적 이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순 명료한 문장으로 상황을 설명한 뒤 속이는 행위에 대한 다각적 고찰을 정연하게 전개한 글을 따라가다 보면, 시원하게 뻗은 아우토반을 달리는 듯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된다.
‘보일러 속이기’란 전기난로를 사용해 조절기 온도를 올리는 것을 뜻한다. 평소 온도를 18도로 설정하고 부족한 온기는 햇빛과 전기난로(태양열 난로)로 보충해 오던 터라, 요즘 먼동이 틀 때쯤 보일러가 가동되는 것이 아깝다.
조금만 참으면 햇빛과 난로가 18도로 올려줄 텐데 그때까지 가스가 소비되는 것이 아까운 것이다. ‘노랑이 근성’을 발휘해 조절기를 향해 난로를 돌려놓는다. 그랬더니 바로 18도가 되어 보일러가 멈춘다. 그런데 집안 온도는 아직 17도이므로 보일러가 속은 것이다.
그런데 아내는 “화가 난 기색”이다.
아내 역시 작가 못지않은 노랑이지만 “‘속이는 것’에는 딱 질색”이다. 이에 비해 작가는 속이기 자체는 비도덕적이지만, 상황에 따라 허용할 수 있다고 본다.
“가스를 절약할 것인가, 아내의 기분을 존중할 것인가?” 저울질하다가 아내를 속이기로 한 것도 이 입장에 따른 결정이다.
속이는 행위의 타당성을 위해 작가는 ‘소극적 공리주의’를 이용한다.
곧 보일러를 속여도 “보일러는 아파하지 않고, 그 때문에 어떤 다른 사람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내를 속이는 일 역시 아내를 포함해 어떤 사람에게도 해를 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원을 아껴서 환경오염을 줄이려는 것이므로 공익을 위한 행위임을 역설한다.
이로써 이 글은 매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된 전반부와 삶의 철학이 자연스럽게 유로된 후반부가 결합되면서, 흥미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글로 완성된다.
그리고 자신의 소신을 드러내되, 도덕 교과서의 진지한 어조 대신에 유머러스한 톤으로 서술함으로써, 해학적 분위기와 자연스러운 설득력을 확보한다.
특히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작가의 철학을 명확하게 전달한다.
그리하여 쉬우면서 명징한 표현은 평생 견지해 온 신념을 실현한 삶과 풍부한 학식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한다. 이 경지에 이르렀는데, 속물적 과시와 허세, 미문이 왜 필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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