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오디세이> 25 여름호 게재
글 쓰다가 딴짓을 많이 한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는 물론이고, 한 두어 문단 잘 써졌다 싶으면 일어나 괜히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면서 평소 하지 않던 일을 한다.
갑자기 창틀 먼지를 닦거나, 액자 유리를 닦거나 하면서. 핸드폰으로 기사를 검색하다가 옆으로 새서 엉뚱한 물건을 산 적도 많다.
그날도 글을 쓰다가 문득 둘러보니, 창 너머로 봄 햇살이 환하게 넘실거리고 있었다.
불현듯, 본격적으로 햇살을 즐겨 봐야겠다는 마음이 솟아올랐다. 쇠뿔도 단김에 빼자며, 책과 종이들로 어질러진 책상 위를 주섬주섬 치우고는, 책상을 창가 옆으로 바짝 붙여 놓았다.
대강 정리를 마친 후에 커피를 내려 들고 왔다. 오른편 창을 통해 따스하게 들어오는 볕을 만끽하고 있으니, 오롯한 공간이 새로 생긴 느낌이 들었다.
쓰던 원고는 잊고 느긋함 속에 잠겨 있는데, 푸드득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내 망중한을 깨트렸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우리 아파트는 창밖으로 에어컨 실외기를 내놓을 수 있는 거치대를 달아 놓았는데, 수시로 비둘기들이 날아와 똥을 싸놓곤 해서 골칫거리이다. 나도 비둘기가 날아온 걸 발견하면 쫓기 바빴다.
그런데 그날 날아온 비둘기는 조금 자그마했는데, 에어컨 거치대 난간에 앉더니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내 쪽으로는 뒷모습만 보인 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홀로 앉아 있는 비둘기가 고독해 보였다.
고독한 비둘기라니, 실소가 흘러나왔다.
아니, 내가 외로운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봄 햇살이 너무 화사해서 그런가, 하다가, 불쑥 근원 김용준이 두꺼비 연적을 산 이야기가 떠올랐다.
근원이 심심하면 들르던 골동품 가게에서 못생긴 두꺼비 연적을 사 온다.
앞으로 앉히고 보아도 모로 앉히고 보아도, 어리석고 못나고 바보 같은 두꺼비. 근원은 한탄한다.
“너는 어째 그리 못생겼느냐. 눈알은 왜 저렇게 튀어나오고 콧구멍은 왜 그리 넓으며 입은 무얼 하자고 그리도 컸느냐. 웃을 듯 울 듯한 네 표정! 곧 무슨 말이나 할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왜 아무런 말이 없느냐.”
호사스럽게 치레를 했지만 화려해 보이는 게 아니라 “시골 색시가 능라주속綾羅綢屬을 멋없이 감은 것처럼 어색해만” 보이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너를 왜 사랑하는 줄 아느냐,” “나는 고독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의 고독함은 너 같은 성격이 아니고서는 위로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는 그의 고백이 가슴을 아릿하게 건드린다.
더 나아가 그는 두꺼비를 문갑 위에 두고는 자다가도 잘 있는지 확인한다.
자다가 “버쩍 불을 켜고” “멍텅구리 같은 두꺼비가 그 큰 눈을 희멀건히 뜨고서 우두커니 앉아 있는가를 살핀 뒤에야 다시 눈을 붙”인다는 마지막 장면은 암울한 식민지 시대, 이상을 실현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그의 우울과 고독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전한다.
근원이 느낀 고독의 깊이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외로움이란 단어가 왜 떠올랐나, 곰곰 내 마음을 들여다봤다.
인간의 영혼에 깊은 긴장을 선사하는 것은 부정성이라는 한 철학자의 통찰처럼 슬픔이나 외로움은 삶을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고독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하찮음을 깨우치게 되고, 불행을 견디고 감내하는 과정을 거쳐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게 되므로.
내가 지나온 시간은 앞만 보고 달리느라 옆을 볼 새 없는 날들이었다.
집안일과 학교 강의, 연구에 이르기까지 분초를 아끼며 살아왔으므로, 외로워도 외롭다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외로운가 하는 느낌이 좀 뜻밖이었던 것이다.
혼자라는 인식은 그렇게 쓸쓸함만이 아니라 적당히 감미로움이 섞인 채 나를 찾아왔다.
내가 광대한 우주 속 아주 작은 존재임을 되새기게 하면서. 그리고 그 되새김이 슬프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게 나를 감싸주면서. 먼지처럼 작은 내가 무한한 자유로움의 출렁임 속에 흘러가다가 어딘가에서 무화無化되리라는 상상이 내 마음을 한없이 고요하게 가라앉혔다.
그러자 뾰족하게 솟아 있던 마음이 고자누룩해진다.
긴장된 신경이 물렁해지면서 주변의 사물이 사랑스러워진다.
비둘기도 쫓아버려야 할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친구처럼, 또 다른 나처럼 정겨워진다.
넌 뭘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니? 누구를 기다리고 있니? 다정하게 묻고 싶어진다.
근원이 두꺼비로부터 위로받았듯이, 비둘기가 나의 고군분투와 외로움을 알아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가, 한참 가만히 앉아 있던 비둘기가 흘낏 옆을 보았는데, 마치 내게 인사를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얼토당토않은 생각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렇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