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좋은 수필

인연, 그 투명하고도 푸른 흔적

- 정태헌의 수필 <푸른 비망록>을 읽고

by 한혜경


기억 저 아래 까마득히 묻혀 있던 일이 되살아나는 순간이 있다.

서툴게 똥땅거리는 피아노 소리, 마가린 바른 토스트의 맛, 낯선 길모퉁이에서 불쑥 마주친 풍경 앞에서 아득해지는 때가 있다.

누군가 꺼버린 우리 몸속의 방에 반짝 전원이 켜진다. (『타임셸터』)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의지적인 기억” 곧 지성에 의해 기억하는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라고 하면서, 의지와 무관하게 기억이 떠오르는 순간을 그 유명한 마들렌 장면으로 형상화했다.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모금이 입천장에 닿는 순간,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정태헌의 <푸른 비망록>은 이러한 “비의지적 기억”의 흔적을 ‘인연’으로 받아들이며 “삶의 흐린 발자국들”을 되새긴 아름다운 글이다.


여름날 새벽, 새소리로 눈을 뜬 작가는 창밖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 한 마리를 본다.

“갓난아이의 주먹만 한” 작은 박새. 가만히 창문을 열고 새를 응시한다.

“좁쌀만 한 박새의 눈동자”로부터 “그날 그때가 고개를 슬며시 든다.”


IMG_7395.jpg



“삶이 뿌리째 흔들리던 스물세 살 겨울”,

“눈길 고운 이를 잃은 상실과 좌절로 허물어진 가슴을 추스르기 위해” 깊은 산골 암자에서 칩거하던 때.

사흘째 날 밤, 눈 오는 소리조차 방 안에서 들릴 정도로 고요한 밤, 눈밭 위를 밟는 발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가만히 문을 여니 “온통 달빛에 젖은 눈 덮인 세상” 속에 웅숭그리고 있는 조그만 물체가 있었다.

장끼였다.

“눈밭의 달빛과 남포 불빛에 반사된 장끼의 투명한 눈빛”을 묵연히 바라본다.

잠시 후 장끼는 사라졌고, 다음 날 아침 작가는 십여 일 칩거하려던 결심을 허물고 산을 내려온다.


여름 새벽인 현재와 수십 년 전 겨울밤,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일어난 새와의 눈 맞춤은 “뜻밖의 인연이요 흔적”이 아닐 수 없다.


그 흔적의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에 “그 사람”이 있다.

작가는 그의 “투명한 눈빛과 고요한 눈길”을 “여태 잊지 못하고 있었”음을, 그 눈길이 “당초무늬”로 새겨져 있음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도정은 “침묵의 돌계단”을 오르는 묵언 수행과도 같다.

여섯 번에 걸쳐 나타나는 “고요”, 두 번 나오는 “가만히”, “묵연히”와 같은 어휘가 빛무리처럼 글을 에워싸고 있으므로, 독자 역시 이 고요한 침잠에 동행하면서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된다.


이 고요는 맑고 청아한 새벽처럼 “투명”하면서 “푸른” 빛을 띤다.


살다 보면 상실과 좌절로 허물어지는 때도 있지만, “뜻밖의 인연”과 조우할 수도 있으며, “천 길 낭떠러지”에 서 있다가도 불빛을 만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 이를 기록한 글은 응당 푸른빛이어야 하리라.



*** <데일리 한국> <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 - 68> 2025. 6.30 게재

(수필 원문 포함 )

https://daily.hankooki.com/news/articleView.html?idxno=1236609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흘낏 옆을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