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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좋은 수필

안다는 것

<에세이 문예> 2025 여름 게재

by 한혜경


뒤늦게, 아내가 죽은 후에야, 아내가 명랑한 여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자가 있다.

심지어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해하는 아내의 모습은 그에게는 없는 기억이다.

오랜 시간 행복한 부부로 살아왔다고 믿었던 남자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을 때 더 명랑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질투심의 파도가 밀려온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다른 남자」속 남편의 이야기이다.


또 다른 장면, 화기애애한 집들이 모임이다.

30년 지기 친구들이 부부 동반으로 우아한 식사를 즐기는데, 한 친구가 게임을 제안한다.

각자의 핸드폰을 식탁 위에 꺼내 놓고 그때부터 모든 문자와 통화를 공유하는 게임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 사람마다 감추고 있던 비밀이 드러난다.

내가 알던 친구, 내가 사랑하는, 나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배우자의 다른 얼굴을 만난다.

영화 <완벽한 타인>의 이야기이다.


내가 안다고 여기는 일들의 많은 부분이 이러하지 않을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데, 빙산 전체를 아는 것처럼 착각했음을 요즘 뼈아프게 느끼는 중이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서 상당 부분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다. 부지런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 여겼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혀 다른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 행동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연민이 일어나는 한편으로,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하는 배신감이 뒤섞여 올라와 여러 날 밤잠을 설쳤다.


평소 “안다”라는 행위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누군가를 안다고 했을 때, 과연 얼마나 아는 것일까, 따져 보기를 좋아하고,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경계해 왔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란 속담 표현에 감탄하면서 “안다”라는 동사를 함부로 쓰지 않으려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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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혜영 교수 작품 -



그런 까닭에 검증되지 않은 지식을 확신을 갖고 주장하는 「치숙」의 ‘나’와 같은 부류를 싫어한다.

채만식의 유명한 단편 「치숙」에는 어리석은 아저씨를 경멸하는 ‘나’가 등장한다.

사회주의를 하다가 감옥살이를 한 오촌 고모부를 “주책꾸러기”에다가 “세상에 해독만 끼칠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나’.

그는 자신의 앞날을 비롯해 모든 것에 자신만만하다. 자신의 기준이 틀렸으며 자신의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신념을 지녔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신념이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에 위험한 인물이다.

그에게 기준은 “다이쇼”(주인)의 말이며 일본이다.

읽을거리며 오락물이며 모든 게 일본 것이 좋으며 일본 여자와 결혼해 아이들도 일본 학교에 보내겠다는 꿈을 피력하며 잘못된 상식을 서슴없이 설파한다.


“경제는, 돈 모으는 것이고 그러니까 경제학이면 돈 모으는 학문이지요.”

얼토당토않은 말에 아저씨가 당혹해하자, 자신의 말이 까다로워서 못 알아듣는다고 오해한다.


실제 주변에서도 이런 사람을 종종 본다.

그때마다,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조심하는 계기로 삼곤 했다. 그런데 지식을 말하는 것은 나름 조심했는데, 사람을 아는 일에는 오만했던 것 같다.


사람 됨됨이를 웬만큼 잘 파악한다고 생각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조언도 했다.

믿었던 사람에게서 상처를 받고 우울해하는 벗에게 위로를 보내면서, 겉만 보면 안 된다느니, 사람은 길게 사귀어봐야 한다느니, 잘난 척을 했다.


이 무슨 교만함인가. 한번 좋게 본 사람은 쉽게 믿고 일면만 알고 있었으면서...

그 사람이 한 행동으로 고통스러웠던 것과는 별개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으니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이렇게 또 한 고개를 넘는구나, 싶다.


송나라 시인 양만리의 아름다운 시 <초여름 잠에서 깨어>에 버들꽃을 잡으려는 아이들 정경이 묘사되어 있다.

천진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릴 듯 생명력이 눈에 선해 좋아했던 부분인데, 이제는 잡히기 어려운 버들꽃을 잡으려는 몸짓에 눈이 간다.

누군가를 안다는 일이 잡히기 어려운 버들잎을 잡으려고 뛰어다니는 것과 같지 않을까.


앞으로 “누군가를 안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버들꽃을 잡으려는 노력은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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