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좋은 수필

사유를 사유하다

<에세이문예> 2025 가을 게재

by 한혜경


‘사유’


수필을 이야기할 때 자주 마주치는 말이다. “사유가 깊다, 사유가 좋다, 사유가 없다, 사유가 얕다” 등등에 “개념 사유” “형상 사유”와 같은 복합명사도 있다.


그런데 사유가 뭐지? “사유가 있다, 없다”를 어떻게 구분하지? 물었을 때, 명쾌하게 답하기가 어렵다.

흐릿한 안개가 주변을 감싸고 있는 섬처럼 거기 있는 것은 확실한데 어떤 모양인지 명확히 파악되지 않으며, 익숙하지만 정작 실체는 알 수 없는 모호한 얼굴을 하고 있다.


최근 연달아 사유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어, 이 말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도는 중이다.

처음은 김형진 선생님의 <새벽길>을 토의하는 시간에 들었는데, 이틀 후 다른 모임에서 또 들었다.


<새벽길>은 설명 없이 장면 묘사만으로 삶을 돌아보게 한 저력이 감탄스러운 글이었다.

타지에서 하숙을 하는 소년이 하숙에 가져갈 쌀자루를 메고 가는 새벽길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깜깜한 겨울 새벽, 무거운 쌀자루, 논둑과 오르막 산길을 거쳐 면 소재지의 버스정류장까지 한참 걸어야 하는 눈 쌓인 길... 소년 앞에 놓인 몇 겹으로 중첩된 어려움은 그대로 우리 삶의 은유이다.


그러나 쌀자루를 이고 앞서서 걸으며 아들을 독려하는 어머니가 있고, “무슨 일이든 고비가 있은게, 그 고비만 잘 참고 전디면 되아야.” 아버지의 소신이 함께한다. 그래서 삶에 대해 한마디도 서술하지 않았지만, 무거운 짐을 지고 눈 쌓인 오르막길을 오르듯 고비를 넘어야 하는 것이 우리 삶이며, 함께 가는 이가 있으면 견딜 만하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환기한다.


논의가 잘 끝나고 자리를 정리하는데, 한 분이 다가와 물었다.


“이 글에 사유가 있어요?”


“드러내서 설명하지 않았지만 작가의 생각이 행간에 숨어 있고, 눈길 걷는 장면에 주제가 박혀 있지요. 묘사로만 이루어져 있어서 그 감동이 더 커요.” 했더니,


“그런 게 사유인가요?” 갸우뚱했다.


이틀 후 모임에서는 일본 산문선 『꽃을 묻다』에 대해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들었다.

한 분이 이 산문들에 사유가 없는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어, 또 사유네.’

무슨 뜻인가 좀 더 들어보니, 철학적 전거나 지식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렇게 느낀 것 같았다.

이분이나 이틀 전 갸우뚱했던 분이나 모두 어려운 개념과 사상을 언급하지 않으면 사유가 없다고 간주하는 듯하다. 사실 나도 그런 편이니, 이참에 한 번 사유에 대해 되짚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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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사유라고 해서 꼭 철학자의 견해를 끌어올 필요가 없고, 살아오면서 겪은 일들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지혜가 녹아 있으면 최상의 사유가 될 터인데, 그런 글을 만나기 어려워서일까. 문득 연암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가 떠올랐다.


연암은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 건너면서 세차게 흘러가는 강물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가 매우 여러 가지로 들리는데, 듣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들릴 수 있음을 꿰뚫어 본다.

가령 벼랑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는 분개한 상태서 들은 것이고, 수많은 개구리가 다투어 우는 듯한 소리는 교만한 상태서 들은 것이라고 하면서, 이는 올바로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속에 미리 정해 놓은 생각”에 따라 귀가 그렇게 들었을 뿐이라는 통찰에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사유에 대한 그들의 견해도 미리 정해 놓은 생각에 따른 것이리라.

사유란 이런 것이다, 먼저 정해 놓고 그런 내용이 없으면 “사유가 없다”라고 결론 내는 것, 철학적 사상이나 위인의 명언을 인용하거나 그에 기댄 내용이 언급되어야 사유가 있다고 여기는 것, 모두가 내 귀에만 들리는 소리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니 몇 달 전 읽은 글이 기억난다.

작년부터 좋은 수필을 선정해 짧은 평을 연재하고 있어서, 종종 수필을 추천받는다. 그 글은 참 잘 쓴 글이라며 추천받은 글이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화려한 수사에 문장력이 능숙한 것은 맞는데, 멋을 부리려 한 점이 거슬렸다. 여러 가지 지식을 끌어와 치장하느라, 정작 보여줘야 할 알맹이가 덮인 것이다.


이 작가 역시 다양한 지식을 나열하는 것이 사유가 깊은 글이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럴듯하게 치장한 장식은 진실을 가릴 뿐임을 잠시 잊고서.

좋은 글에서 지적 개념이나 철학적 사고의 편린을 발견할 순 있지만, 철학적 사유가 있다고 모두 좋은 글이 되는 건 아님을 놓친 것이다.


나 또한 사유가 있는 풍성한 글처럼 보이고 싶어서 이런저런 책과 지식을 빌려오곤 한다.

연암은 “글이란 뜻을 드러내면 그만일 뿐이다.” 단언했으나, 지식 창고는 옹색하고 영감은 언제 찾아올지 아득한 범인(凡人)으로서는 무어라도 채워 넣고 싶을 뿐이다.

단순한 것이 가장 좋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결여를 숨기고 싶은 저급한 욕심과 성급한 마음이 그 사실을 가린다. 그리고 살면서 자연스럽게 체득한 지혜가 부족하다 보니, 인위적으로라도 저명 학자의 말이나 책의 문장을 동원한다.

사유는 사유라는 이름에 갇혀 시들시들 말라간다.


남의 말을 빌려오지 않고 구구한 설명 없이도 삶의 정수나 본질을 그려내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할까. 가닿기 어려운 곳을 향해 가는 길에 서서, 살아서 펄떡이는 사유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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