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창작수필> 2025 가을호 게재
텔레비전 뉴스에서 낯익은 장소가 비친다.
“어? 저기 금화터널 아냐?” 내 말에
“아, 맞네. 근데 저기서 멧돼지가 나온 거야?” 딸이 놀란다.
블랙박스 영상과 함께 앵커의 설명이 나온다.
저녁 8시 50분쯤 금화터널 앞에서 서행하고 있는데, 왼편 수풀에서 뭔가 움직이는가 싶더니 멧돼지가 도로로 뛰어든다.
곧바로 “쿵!” 하고 차량에 부딪힌다. 놀란 운전자는 비명을 지르며 차를 멈춘다.
영상 왼편 아래에 멧돼지가 희끄무레하게 보인다.
멧돼지는 이후 그 주변 주택가를 40여 분 동안 ‘활보’했는데,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다.
경찰은 금화터널 인근에서 순찰차로 멧돼지를 막은 뒤 전문 엽사를 투입해 ‘사살’했다. 신고한 지 약 40분 만이라고 한다.
지방에서 멧돼지가 출몰했다는 보도는 가끔 들었지만, 서울에서, 그것도 내가 아는 동네에 나타났다니 놀라웠다. 운전자가 기겁했겠다는 생각 한편으로 “활보”와 “사살”이란 단어가 마음속에서 파문을 일으킨다.
활보란 “발자국을 크게 떼며 거침없이 힘차고 당당하게 걷다” “제 세상처럼 기세등등하게 행동하다”란 뜻인데, 멧돼지가 그랬을까. 오히려 어리둥절, 혼비백산에 가까웠을 것 같다.
여기가 어딜까, 집으로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까, 배는 왜 이리 고픈지.
순찰차가 압박해 올 땐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으니 그저 공포스러웠을 것이다.
어안이 벙벙한 채 숨을 거두지 않았을까.
멧돼지에 대해 검색해 보니 인간이 연민을 느끼기에는 매우 위험한 맹수라고 한다.
시속 40-50 km로 질주할 수 있고, 날카로운 엄니를 가졌고, 위협을 느끼면 망설이지 않고 달려들어 공격하니 조심해야 한다고.
직접 맞닥뜨렸다면 나 역시 당연히 공포에 떨었겠지만, 뉴스 속의 멧돼지는 이야기 속 비극적 인물처럼 마음을 톡톡 계속 두드려 댔다.
근처 안산에서 지내고 있었을까? 새끼를 거느린 어미였을지도 모르겠다. 배고파하는 새끼 먹이를 찾으려고 좀 위험해 보여도 사람들 사는 곳까지 내려왔을 수도, 도로 돌아가려 했으나 방향을 잃었을 수도 있다.
익숙하지 않은 자동차 소리로 감각이 마비되었을지도 모른다.
상상이 이어진 끝에 익숙한 느낌이 서늘하게 퍼진다.
종종 찾아오곤 하는 선득함.
어릴 때부터 길을 잘 찾지 못해 헤매는 적이 많았다.
초등학생 때 선생님 심부름으로 교무실에 가야 하는데, 교무실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우던 기억이 있다.
왜 그리 복도가 길고 계단은 많은지, 희뿌연 안갯속에 있는 것 같았다. 근시 안경을 벗었을 때 주변이 희끄무레하게 보이듯.
그날의 느낌은 그 뒤로도 잊을 만하면 찾아왔다.
몇 번 와 봤던 식당이라 쉽게 찾겠지, 긴장을 늦추고 걸어가던 어느 날, 그즈음 복잡하게 돌아가는 일들이 떠올랐다. 꽤 골똘히 생각했는지, 문득 돌아보니 낯선 골목이었다.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여기가 어디지? 왜 이리로 왔지? 마침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길 가 가게에 하나둘 불이 켜지니 더더욱 낯설었다. 한 발걸음 떼었는데, 훌쩍 다른 생의 시간으로 순간 이동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매번 삶의 길모퉁이에 설 때마다, 여기가 어디지? 어디로 가야 하지? 곤혹스러울 때가 많았다. 어느 길로 가는 게 맞을지 불안하고, 선택한 길이 옳은 방향인지 헷갈렸다.
그럴 때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이쪽으로 와.” 이끌어주고, “옳은 방향으로 잘 왔어.” 다독여주면 좀 수월할 텐데, 그런 사람이 늘 존재하진 않는다.
그래도 막다른 골목에 오래 갇힌 적은 없었던 것 같으니 고마울 뿐이다.
시간이 걸리기도 했고 시행착오도 겪었지만, 어느 길이든 찾아보려 했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람”이었던 그레고리우스가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타버리는 것 같은 극적 변화는 없었지만(『리스본행 야간열차』), 거친 비바람이 몰아치는 들판에 겁 없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 들판에서의 시간은 혹독했으나, 많은 것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출구가 없는 줄 알았는데, 가 보면 희미하나마 빛이 보였고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이 숨어 있기도 한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러니 그동안의 시간은 “여기가 어딜까” 당황스러운 상황과 새 세계로 진입했다는 안도감 사이를 시계추처럼 간드작간드작 왔다 갔다 하면서 쌓여 온 셈이다.
방향을 찾기 어려울 때도 많았지만 용케 길을 찾아내면서.
앞으로 바람이라면 “여기가 어딜까”를 덜 마주쳤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보다 더 헤매는 이가 있다면 기꺼이 손을 내미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