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바다> 25 가을 게재
말, 말, 말들의 향연이다.
확인되지 않은 말, 불확실한 말, 그럴듯한 말들이 넘쳐흐른다.
주변을 흥건하게 적시고 도랑을 이루며 흘러간다.
입 있는 사람은 모두 한 마디씩 한다.
내가 아는 내용이 정확하고 적절한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지, 이 말에 책임질 수 있을지,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개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맞겠지, 어쩌다 확인해야 된다는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짐짓 눌러서 가라앉힌다. 정작 입을 열어야 할 때엔 모른 척한다.
명백히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있다.
같은 단체에서 오랜 친구로 지내오던 회원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잘못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로 인한 피해는 어느 정도인지, 피해 입은 이의 고통은 어떠한지, 짚어야 할 문제는 건너뛰고, 힘들어서 그랬다며 변명하는 그에게 오히려 동정을 보낸다.
힘들면 잘못해도 무조건 괜찮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 사람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진 것일까?
사실을 알려고 하기보다 별생각 없이 그의 변명을 믿는다.
피해를 입은 자가 흘렸을 눈물은 보지 않는다.
얼마 후, 그가 속한 단체에서 일정 기간 활동 정지를 결정하니, 좀 더 강한 제재를 가했어야 한다는 사람, 합당한 처리라고 반기는 사람,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의견 등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더러는 그 결과에 안타까움을 표했다.
또 이상했다. 그의 상황에 가슴 아플 정도라면, 피해 입은 사람의 고통에도 공감해야 하지 않나.
피해자에게는 얼마나 힘들고 괴롭냐는 위로 한마디 건네지 않으면서 잘못한 사람의 입장을 두둔하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이 현상은 뭘까?
잘못을 저지른 사람과 친하고 피해를 입은 사람과는 친하지 않아서?
피해가 심하다고 느끼지 않아서?
모든 이들의 심정을 알 수 없지만, 우리 사회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적어도 불편해한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실감할 수 있었다.
사실, 아무개가 참 안 됐다, 불쌍하다고 연민을 보내는 일은 쉽다.
그렇게 말하면 어딘지 선하고 관대한 사람처럼 보이니까.
사람 좋은 웃음을 띠고 “좋은 게 좋은 거죠.” 눙치면 분위기는 부드러워질 테다.
여기에 시시비비를 가리고 잘못의 내용을 따지는 일은 초를 치는 셈일 것이다. 그러니 잘잘못을 논하는 사람을 향해 잘한다고 격려하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왜 저리 나서나, 문제를 더 크게 만드네, 하면서 수군거리는 것이다.
그 수군거림 속에서도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직 세상이 살 만하다는 것이리라. 피해 입은 당사자보다 더 흥분하며 잘못을 성토했던 A선생.
그를 아끼며 걱정하는 사람이 A에게 “이제 그만하세요. 피해 입은 사람보다 당신이 더 욕을 먹고 있어요. 괜히 나서서 욕 들을 일이 없지 않아요?” 했다고 한다.
그래서 A는 “잘못한 일을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왜 욕을 먹어야 하는데요? 피해 입은 사람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아요? 왜 피해자의 상처는 보지 않나요? 당신이 그런 일을 당하면 어떨 것 같아요? 그때 내가 가만히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물었다.
상대방은 묵묵부답이었다고.
A선생 말대로 자신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했다.
지금까지 보여준 태도와 마찬가지로, 잘못한 이에게 너그러울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하기를 원할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니, 나와는 상관없으니 내버려 두자는 이기심이 아니겠는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나오는 아일린의 대사이다.
모른 척해야 할 영역을 건드리려는 남편 펄롱을 향해 던지는 말이다.
모두가 쉬쉬하는 수녀원의 세탁소.
타락한 여성을 수용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마구잡이로 여성과 아이들을 강제 노역시키는 사실을 알고 고민하는 펄롱을 제지하려는 말이다.
아일린은 덧붙인다.
펄롱 역시 모른 척하고 싶었으나, 용기를 낸다.
수녀원에 갇혀 있던 아이를 데리고 나오는 것이다.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그는 뭔지 모를 기쁨이 솟는 것을 느낀다.
그가 아이에게 건넨 말은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이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을 누르고 “세상에 맞설 용기”를 표현한 말이므로.
문제를 조용히 덮고 모른 척하고 싶은 욕망은 매우 강력하다.
그것이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잘 사는 길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눈 감으면 안온하게 살 수 있는데 그것을 거부하고 금기를 건드리는 일은 그래서 위대하다.
펄롱이 그랬듯이,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여러 부분들 중에서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기를 꿈 꿔본다.
그럴듯하지만 무책임한 말 대신 해야 할 말과 용기 있는 말들이 넘쳐나면 참으로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