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기도

<데일리한국> "내 인생의 잊지 못할 물건" 게재

by 한혜경


“이제 일어나 나갈 거야.” 낮잠에서 깨어나 엄마가 말씀하셨다.

“꿈꾸셨어요? 어디로 가시려고?” 내가 물었다.

“아무 데고 나갈 거야. 내가 나가도 슬퍼하지 말아.” 순간 할 말을 잃고 엄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엄마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내 딸, 이쁘다.” 하며 미소를 지으셨다.



“불휘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뮐씨 곶됴코 여름하나니”


아침에 눈 뜨면 제일 먼저 나를 맞는 글귀이다.

학교 연구실에 걸려 있던 것을 퇴직할 때 떼어서 침실 벽에 걸어 놓았다.

1997년 교수 임용을 축하하며 엄마가 써주신 것이다. 이것 말고도 박사학위 축하 글, 황동규의 시구, 내 글에서 발췌한 문장 등, 엄마가 남긴 서예 작품은 집안 곳곳에서 내 곁을 지키고 있다.


KakaoTalk_20260105_164347945.jpg 내 책의 일부 문장을 써주신 것



엄마 생전엔 고마움을 몰랐다. 서예가니까 써주시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며 덤덤하게 받곤 했다.

글자 한 자 한 자마다 간절한 기도를 담아 쓰셨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엄마 수필에 대해서도 좋다는 말을 한 기억이 별로 없다. 감정이 과하다고 지적만 했다.

어렸을 땐 엄마처럼 되는 게 소원이었는데, 머리가 커지면서는 분석하고 비판하는 게 일이었다. 엄마 잘못을 짚을 사람은 딸밖에 없다는 이상한 신념을 갖고서.


“하나밖에 없는 딸이 어째 그리 엄마 편을 안 드니?” 섭섭해서 하시는 말에

“엄마 편을 안 드는 게 아니라, 이건 엄마가 오해한 게 맞는 것 같아.” 난 또박또박 대꾸했다. 지금 돌아보면 딸이 아니라 무슨 판관 같았다고나 할까.

왜 그랬을까 생각해 보면, 엄마가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기를 바라서였던 것 같다.

“저 사람은 글도 좋고 붓글씨도 잘 쓰는데 인품도 훌륭하네.” 뭐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사실 불가능한 일인데, 나 혼자 ‘완벽한 엄마’라는 허상을 만들어놓고 투덜댔던 셈이다.


사실, 엄마 정도면 완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시 서 화를 사랑하셨던 외할아버지 덕분에 일찍부터 문학과 서예의 향기에 매료되었는데, 우리 삼 남매를 낳고 기르실 때 쉬셨다가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본격적으로 글쓰기와 서예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 결실은 놀라워서 수필집 7권에 선집 3권을 냈고, 대한민국 미술대전을 비롯한 여러 대회에서 입선을 했고, 국내외에서 십수 차례 서예 전시회를 열고 제자를 키우셨다. 스스로 표현한 대로 “악바리”가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러니 엄마의 생애는 우아하게 앉아 있는 형용사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동사의 삶이었다.

“노력하다” “연습하다” “쓰고 또 쓰다” 이 동사들 앞에는 “계속해서” “밤새” “될 때까지” “쉬지 않고”와 같은 수식절이 붙는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왔으니, 좀 쉬라는 뜻이었을까.

엄마는 우리 곁을 떠나기 전 3년 8개월여 쉼표의 시간을 보냈다.

미수 기념 수필집 출간과 서예 전시회를 한 달 앞두고 준비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맹장염이었다.


수술받고 보름 후 집에 돌아오신 엄마는 뭔가 좀 달라졌다.

예민하게 촉 세우던 더듬이가 순해지고 꽉 조여있던 나사가 느슨하게 풀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요이 땅!” 출발 신호가 떨어지면 골인 지점을 향해 죽어라 뛰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때까지 쓰고 또 쓰고 하던 시간에서 훌쩍 다른 세계로 건너뛰신 것 같았다.

이젠 길가 작은 풀에 눈길도 주면서 흥얼흥얼 콧노래도 부르며 소요하리라 하는 듯했다.


엄마는 이쯤에서 그만할까 보다, 생각하셨을까.

그동안 열성을 다해 살아왔으니 이젠 내려놓아도 괜찮다고 생각하신 걸까.


수필집 얘기를 꺼내면 “천천히 하지 뭐. 안 내도 그만이고.” 하시고, 안부를 여쭈면 “나야 항상 좋지. 잘 먹고 잘 자고.” 함박 웃으시며 말끝에 “고맙다.”를 덧붙이셨다. 3년 8개월 동안 가장 자주 들었던 말과 문자가 “고맙다.”와 “좋아.”이다.


그런데 3년이 넘어가자 드시는 양이 현격히 줄고 서서히 쇠약해지셨다.

그리고 답 문자의 철자가 틀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초반엔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는데, 어느 날 보낸 문자는 영 알 수가 없었다. “내 대 ㅏ” “내 달아” “내” “ㄷ ㅎ” “으” “내 ㅣ디 ㅏ” “달아” “나 ㅐ”... 무슨 말인지 통 감을 잡지 못할 말들이 한참 이어지고 있었다.


그 끝에 비로소 완성된 말은... 바로 “내딸아!”였다.

상상도 하지 못한 말에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내 삐딱함을 다 품으셨구나, 사랑으로 감싸 주셨구나, 내 딸이어서 좋다고 하시는구나, 죄송한 마음과 감사함이 뒤섞여 폭포수처럼 내리 꽂혔다.


그러고는 서너 달 지났을까.

낮잠에서 깨신 후 “내 딸” 뒤에 “이쁘다”를 더해서 말로 표현하신 것이다.

이 말은 “네가 내 편 들지 않는다고 가끔 섭섭했던 것, 다 흘려보냈어. 엄마 아프다고 바쁜데도 와서 수발 들어줘서 고맙구나. 이제 내가 떠나도 슬퍼하지 말고 이쁘고 씩씩하게 잘 살아라.”가 녹아있는 말이었을 것이다.


오늘도 엄마의 글씨를 보며 일어나, 엄마의 응원 속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면 핸드폰을 열어 엄마의 문자를 들여다본다.

길게 아래로 이어지고 있는 불완전한 글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원하는 단어가 나올 때까지 거듭 다시 찍었을 엄마의 안간힘과 사랑이 해일같이 밀려온다.

사랑을 표현하고자 될 때까지 쓰고 또 썼던 그 간절함을 마음 깊이 새긴다.


*** <데일리한국> 2025. 12.30 게재

https://news.nate.com/view/20251230n37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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