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생각하는 정원]에서
어린 시절 우리 집이 있는 골목에서 조금 올라가면 담이 낮아 안마당이 훤히 보이는 집이 있었다.
상당히 큰 뜰에 잔디가 고왔고, 나무의 잎새가 푸르러지고 꽃이 피는 계절이 되면 풍요로우면서도 아름다웠다.
‘정원’이란 단어는 그렇게 내 마음에 새겨졌다.
그냥 나무 한두 그루 서 있는 현실의 ‘마당’과 구별되는 동화 속 세계처럼.
누군가의 보살핌이 있어야 그런 정원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할 때라 그저 보기 좋으면 좋았다.
아마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도 섞였던 것 같다.
최근 이슬람 문명에 대한 책을 읽다가 오래전 이 기억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내가 품고 있던 정원에 대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사막 지역의 험악한 환경과 가혹한 기후가 이슬람 예술에 ‘정원’이란 분야를 탄생시켰다는 설명에서였다. 정원을 천국이 땅 위에 반영된 것으로 상상해서 11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눈부신 정원예술이 발달했다는 것이다. 지배층은 재산과 권위의 상징으로 규모가 큰 정원을 누렸고, 보통 사람들도 자그마한 정원을 꾸며 최소한으로라도 자연을 느끼곤 했다고 한다.
푸른 나무와 다채로운 꽃들이 세밀하게 배치된 정원에서 현실의 먼지와 열기, 단조로움을 잊으려 한 이슬람 사람들. 낮에는 작열하는 태양과 뜨거운 바람이 몰아치고 밤이면 살을 에는 추위가 덮치는 기후에 황량한 풍경만 펼쳐져 있는 환경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려 한 것이니, 결핍에서 비롯된 상상의 멋진 결과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또 다른 정원을 만나게 되었다. 마음 맞는 문우들과의 제주 여정에서 찾은 [생각하는 정원]이다.
‘생각하는 정원’이라니, 정원이라면 그저 풍경을 즐기면 되는 게 아닐까, 무엇을 생각하는 걸까 호기심을 갖고 둘러봤는데, 과연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제주의 오름을 형상화한 나지막한 언덕 사이로 수천 점의 분재와 나무들, 연못이 조화로운 거대한 정원인데, 우선 분재에 대한 편견을 여지없이 깨뜨렸다. 자연 속에서 잘 자라고 있는 나무를 잘라서 생기를 잃게 한 것이 분재라고 여겼는데, 이 정원의 분재들은 자연 속 나무와 다름없이, 아니 더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각 분재와 나무 옆에 놓인 안내판은 나무의 특성뿐 아니라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기도 하고 삶에 대한 사유를 유도하고 있어 특별했다. 나뭇가지에 돌덩이가 붙어있는 느릅나무의 안내판에는 그 유래에 대한 설명 뒤에 “분재의 가지는 계속 다듬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영원히 미완성입니다. 사람의 인격도 또한 영원히 미완성인 것 같아요. 죽음의 순간까지 닦고 닦아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는지......” 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나무를 설명하다가 인격 이야기라니......
독특한 모양의 주목, 큼지막한 열매를 매달고 있는 모과나무, 제주 토종 윤노리나무, 돌을 안고 있는 느릅나무 등, 다양하면서도 색다른 나무들에 경탄하는 데 그치지 말고 인생에 대해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이 읽혀 이 정원을 가꾼 이가 누구일까 궁금해졌다.
1968년 가시덤불 돌짝밭을 개간하기 시작해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만져 오늘의 정원을 이뤘다는 성범영 원장의 이야기는 놀라움과 감탄의 연속이었다. 제주에서 가장 낙후되고 척박한 땅에서 미친놈 소리를 들어가며, 수없이 다치고 수 차례 수술까지 받으며 정원을 일궜다고 한다. 그 고된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신앙 덕분이었다고 했는데, 신앙의 힘뿐 아니라 나무를 가꾸면서 저절로 수양이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무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성원장의 말대로 나무들은 정직했다. 분재라고 해서 생기를 잃은 게 아니라 다른 나무들보다 더 오래 살고 건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빛나는 몸으로 증언하고 있었다. 본질은 외면하고 일면만 보는 인간이 우습다는 듯.
저렇게 나무가 싱싱한데, 나무의 천성을 억압한 것인가, 야성을 교정한 것인가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지 않은가. 심지어 돌담 사이에서 태어나 돌 때문에 죽을 수 있던 나무를 보살펴 돌을 감싼 상태로 살아나게 했으니, 방법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살림’이 중요한 게 아닐까. 어떤 형태로든 살아 있는 게 중요하지, 지엽적인 논의로 본질을 흐릴 필요가 있을까.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오래도록 마음에 남은 것은 분재는 계속 가지를 다듬어 주어야 하므로 영원히 미완성이라는 말이었다.
완결이란 완전히 끝을 맺는 것이니 더 이상 변할 여지가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완결되지 않은 미정형의 세계는 가능성이 남아있으므로 미래로 열려 있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다.
나뭇가지를 계속 다듬듯이, 우리의 생각도 이리저리 매만져야 좀 더 나은 모양이 되리라.
굳어 있던 관념을 흔들어 변화의 물꼬를 트고, 일면만 보던 습관에 균열을 내고, 나에게 익숙한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고, 깨지면 안 되는 공고한 세계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래서 내 삶을 이루어 온 많은 풍경들이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으면서,
정원 안에서 생각이 물처럼 흘러간다.